마라톤의 스피드 싸움이 가속화되고 있다. 마지막 100∼200m를 단거리선수처럼 달리며 승부를 결정하는 ‘트랙 싸움’ 시대에 접어든 것. 그만큼 이젠 스피드 없는 마라토너는 세계무대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22일 끝난 107회 보스턴마라톤을 끝으로 2003시즌 세계마라톤 상반기 주요 대회가 막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세계 남녀 마라톤의 속도 경쟁이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진행되고 있다”고 총평했다.
남자부 올 시즌 최고기록은 4월 6일 열린 파리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한 마이클 로티치(케냐)의 2시간6분33초. 지난해 런던마라톤에서 할리드 하누치(미국)가 세운 세계 최고기록(2시간5분38초)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대회 4위까지가 모두 2시간6분대를 기록해 올 시즌 ‘톱4’를 차지할 정도로 ‘스피드 경쟁’이 눈에 띄었다. 기록 랭킹으로 따지면 로티치의 기록은 역대 10위.
거트 타이스(왼쪽)과 지영준이 2003동아서울국제마라톤에서 막판 트랙싸움 끝에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
‘기록의 산실’로 정평이 난 로테르담마라톤과 런던마라톤에선 높은 기온 때문에 기대에 못 미쳤지만 역시 스피드 싸움에서 승부가 갈렸다. 로테르담에선 윌리암 킵플라가트(케냐)가 2시간7분42초로 조세파트 키프로노(2시간7분53초·케냐)를 11초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런던마라톤에선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 하누치가 몸살로 빠진 가운데 2000시드니올림픽 챔피언 게자헹 아베라(에티오피아)와 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가 2시간7분56초의 동타임으로 피니시라인을 통과, 사진 판별 끝에 아베라가 우승할 정도로 박빙의 승부가 연출됐다.
3월 16일 빗속에서 열린 동아서울국제마라톤도 거트 타이스(2시간8분42초·남아공)와 지영준(2시간8분43초·코오롱)이 막판 스퍼트 싸움을 벌인 끝에 단 1초차로 1, 2위가 갈렸다.
여자부의 스피드 향상은 더욱 눈부시다. 영국의 폴라 래드클리프가 런던마라톤에서 2시간15분25초를 기록, 자신이 지난해 10월 시카고마라톤에서 세운 세계 최고기록(2시간17분18초)을 단 6개월 만에 1분53초 앞당겼다. 케냐 남자 선수 8명을 페이스메이커로 내세워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래드클리프의 기록행진으로 조만간 여자마라톤의 ‘2시간10분벽’이 허물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래드클리프는 마라톤에 데뷔한 지난해 런던마라톤에서 2시간18분56초를 기록한 뒤 1년 만에 3분31초를 앞당겨 여자마라톤의 스피드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2003파리마라톤에서 마이클 로티치가 2위 브누아 즈위르츄스키를 따돌리고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
래드클리프를 제외하면 런던 마라톤 2위 캐서린 은데레바(케냐)만 2시간19분55초이고 나머지는 모두 2시간21분대 이후 기록에 머물고 있다.
한편 남자부에선 여전히 ‘케냐 바람’이 거셌다. 로테르담과 보스턴, 파리, 비와호(일본) 등 대부분의 마라톤을 석권했고 보스턴에선 1위에서 5위까지를 케냐 선수들이 휩쓸었다.
여자부에선 래드클리프의 독주 속에 케냐와 일본 선수들이 뒤를 따르고 있다. 올 시즌 랭킹 2위 은데레바, 오사카마라톤에서 4위를 차지한 로나 킵플라가트(2시간22분22초)와 런던마라톤 4위 수전 쳅케메이(2시간23분12초)가 케냐 출신. 오사카마라톤 1∼3위를 휩쓴 ‘일본 3인방’ 노구치 미즈키(2시간21분18초), 지바 마사코(2시간21분45초), 사카모토 나오코(2시간21분51초)는 올 시즌 랭킹 4∼6위에 올라 있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기록단축 3대요소
날씨, 코스, 페이스메이커….
현대 마라톤에선 선수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레이스 여건’이 잘 갖춰지지 않으면 좋은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중에서도 좋은 날씨는 제1의 조건. 온도는 섭씨 9도 안팎이 가장 적합하다. 바람과 비는 기록단축 ‘최대의 적’. 특히 선수들 앞에서 부는 맞바람은 기록을 2,3분이나 늦춘다. 비도 선수들의 체온을 낮춰 근육을 수축 시키는 악재. 2002동아서울국제라마톤에선 바람 때문에, 2003동아서울국제마라톤은 비 때문에 2시간6,7분대 기록을 놓쳤다. 올해 뉴욕과 로테르담은 섭씨 14도 안팎이었지만 보스턴은 20도나 돼 남자부에서 2시간10분대의 저조한 기록이 나왔다. 가을에 열리는 시카고마라톤은 날씨와 바람을 우려해 오전 7시30분에 출발한다. 2004아테네올림픽 마라톤은 무더위를 피해 저녁 7시에 출발하기로 이미 결정됐다.
코스도 중요하다. 런던과 로테르담, 시카고대회 코스는 평탄하기로 유명하다. 보스턴과 뉴욕은 다소 오르막이 있어 기록이 저조하다. 요즘엔 각 마라톤대회 조직위가 좋은 기록을 위해 앞다퉈 오르막이나 굴곡을 없애 평탄하고 곧은 코스로 바꾸고 있다.
마지막으로 페이스메이커. 풀코스 완주를 포기하고 20∼30㎞까지 끌어주는 선수가 페이스메이커다. 이들이 5㎞를 14분 후반에서 15분 초반대 기록으로 선두 그룹을 이끌어줘야 2시간5분에서 7분대의 기록이 나올 수 있다. 107년 역사의 보스턴은 ‘마라톤 정신에 어긋난다’며 페이스메이커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바로 그 점에서 전통과 권위를 인정받는다. 최근 런던과 시카고마라톤에서 남녀 세계 최고기록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시즌 남자 톱10 | |||
랭킹 | 기록 | 선수 | 장소 |
① | 2시간6분33초 | 마이클 로티치(케냐) | 파리 |
② | 2시간6분36초 | 브누아 즈위르츄스키(프랑스) | 〃 |
③ | 2시간6분47초 | 윌슨 온사레(케냐) | 〃 |
드리스 엘 히메르(프랑스) | |||
④ | 2시간6분48초 | 〃 | |
⑤ | 2시간7분39초 | 자페트 코스게이(케냐) | 비와호 |
⑥ | 2시간7분42초 | 윌리암 킵플라가트(케냐) | 로테르담 |
⑦ | 2시간7분53초 | 조세파트 키프로노(케냐) | 〃 |
⑧ | 2시간7분56초 | 게자헹 아베라(에티오피아) | 런던 |
⑧ | 2시간7분56초 | 스테파노 발디니(이탈리아) | 〃 |
⑩ | 2시간7분57초 | 조셉 은골레포스(케냐) | 〃 |
※○21 | 2시간8분42초 | 거트 타이스(남아공) | 동아서울 |
올시즌 여자 톱10 | |||
랭킹 | 기록 | 선수 | 장소 |
① | 2시간15분25초 | 폴라 래드클리프(영국) | 런던 |
② | 2시간19분55초 | 캐서린 은데레바(케냐) | 〃 |
③ | 2시간21분16초 | 디나 드로신(미국) | 〃 |
④ | 2시간21분18초 | 노구치 미즈키(일본) | 오사카 |
⑤ | 2시간21분45초 | 치바 마사코(일본) | 〃 |
⑥ | 2시간21분51초 | 사카모토 나오코(일본) | 〃 |
⑦ | 2시간22분22초 | 로나 킵플라가트(케냐) | 〃 |
⑧ | 2시간23분12초 | 수잔 쳅케메이(케냐) | 런던 |
⑨ | 2시간23분14초 | 류드밀라 페트로바(러시아) | 〃 |
※⑩ | 2시간23분18초 | 장수징(중국) | 동아서울 |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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