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 한장상(韓長相·63) 프로는 여전히 현역이다. 한국 골퍼로서는 처음으로 ‘꿈의 무대’인 마스터스에 출전(1973년)했고, 한국오픈(1964∼67년)과 한국프로골프 선수권대회(1968∼71년) 4연패의 위업을 이뤘지만 지금도 웬만한 대회엔 빠지지 않고 출전한다.
지난달 20일 김포 시사이드에서 속개된 포카리스웨트오픈에서 그는 2라운드 합계 147타로 컷오프 탈락했다. 경기 후 그를 만났다. 치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웬 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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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경기 중에는 마우스피스를 사용해야 할 것 같아요. 샷을 하면서 자꾸 이를 악물었더니 임플란트 수술한 이에 이상이 생겨서요.”
한국 프로골퍼 1세대(회원 번호 6번, 1번은 연덕춘옹)로 한국선수권 대회에만 45회 출전한 그가 왜 지금도 “필드에만 서면 사람이 180도 달라진다”는 얘기를 듣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언제까지 현역으로 뛸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앞으로 3년을 더 뛰어 투어 50년을 채우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탱크’ 최경주 선수(33·슈페리어·테일러메이드)가 지난해 미국 PGA 투어 정상에 오르고 올해 마스터스 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한 얘기를 꺼냈더니 얼굴에 금방 미소가 번진다.
“경주를 직접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만, 열심히 하면 좋은 선수가 될 거라고 격려한 적은 있어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정상에 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마스터스는 그로서도 아쉬움이 짙게 남아 있는 대회다. 1972년 그는 일본오픈에서 일본의 골프영웅 오자키를 꺾고 우승해 대망의 마스터스 출전권을 따냈다.
우여곡절 끝에 대회에 참가했으나 6오버파 150타를 기록, 1타차로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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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바로 일주일 전에 일본에서 구즈와 국제오픈이 열렸지요. 연장전 끝에 호주의 그레이엄 마시를 꺾고 우승한 후 축하연에 참석하느라 미국행 일정을 하루 늦춰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경유지인 시카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대회 개막 이틀 전에야 오거스타(조지아주) 현지에 도착했지요. 시차적응도 안되고 체력도 소진된 상태에서 연습 라운드도 한 차례만 한 채 필드에 섰으니 경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지요. … 2라운드 16번 홀에서 온 그린된 볼이 뒤로 굴러 연못에 빠지는 바람에 더블보기를 범했죠. 당시 선두와 10타차(마스터스 본선진출 커트라인)였기 때문에 나머지 두 홀만 잘 막으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그만 18번 홀에서 보기를 했어요. 그때의 아쉬움이란….”
그가 골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자연스러웠다. “13세 무렵이었나요. 집 근처에 군자리 경기장(현재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이 있어서 아르바이트로 캐디를 했죠. 캐디를 하면서 헌 클럽을 한 개씩 얻어다가 스윙을 배웠고 1955년부터 정식으로 골프를 시작했죠.”
골프가 너무 어려워 여러 차례 그만둘까 생각도 했다. 골프 대신 권투도장도 다니고 역기도 들어봤지만 골프의 매력을 떨칠 수 없었다.
대회수가 적었던 60, 70년대에 우승확률 80%를 기록하며 ‘기록제조기’로 불렸던 그이지만 요즘의 소박한 꿈 하나는 공식대회에서 ‘에이지 슈터(자신의 나이와 같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가 되는 것.
지금도 주말 골퍼용 레귤러티에서는 60타대 후반을 거뜬히 치는 그의 최근 몇 년간 투어대회 평균타수는 73∼75타.
“주 4, 5일은 반드시 헬스클럽에 갑니다. 체력만 유지하면 60대 후반이나 70대 초에는 정규대회에서 에이지 슈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식대회 25승을 기록해 ‘평생 시드권’을 획득한 그이지만 지난달 29일 최경주 선수가 우승한 SK텔레콤 오픈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젊은 후배들에게 출전 기회를 더 주기 위해 1년에 3개 대회만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이지만 요즘 젊은 선수들에 대해서는 섭섭함이 많은 듯 에둘러 가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필드에선 서로 경쟁한다지만 그래도 나는 어려웠던 시기에 골프를 시작해 이만큼 끌고 온 사람 중 하나 아닙니까. 그런데도 요즘 후배들은 인사도 잘 안 해요.”
그의 한마디에서 문득 ‘사랑하는 사람을 내게 데려오라. 함께 18홀만 돌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네가 그 사람과 18년간 사귀었다고 해도 나만큼 그를 파악하지는 못할 것이다’고 했다던 어느 스코틀랜드 할아버지의 얘기가 떠올랐다.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과 이병철(李秉喆) 전 삼성그룹 회장의 레슨도 맡았던 그에게 주말 골퍼를 위한 ‘원 포인트 레슨’을 청했다.
필자는 지금도 골프스윙을 주도하는 것이 왼팔인지, 오른팔인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그의 답은 이랬다.
“왼팔과 오른팔을 모두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스윙을 하세요.”
안영식기자 ysahn@donga.com
▼한장상 프로는 ▼
-1940년 서울 출생
-1957년 프로 데뷔
-사제관계: 연덕춘(국내프로골퍼 1호)
-한국프로골퍼로서는 처음으로 1973년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 출전
-우승:국내 22승(시니어 3승 포함), 해외 3승
-별명:우승제조기(한국프로골프선수권, 한국오픈 각각 7차례 제패)
-제1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장(1989∼91년)
-제6대 한국프로골프협회장(1984∼87년)
-한국프로골프협회 고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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