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보다 세게…보다 빠르게…” 선수 노리는 ‘약의유혹’

  • 입력 2003년 9월 3일 18시 17분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100m 경기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이 9초79의 세계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100m 경기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이 9초79의 세계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작년 4천여명 적발…매년 급증세

경기력 향상과 금지약물 복용의 유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인가.

스포츠 스타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기량을 향상시키려는 약물 복용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는 평가다. 세계반도핑기구(WADA)에 따르면 2000년 2500명이었던 약물 적발 건수는 2001년 3409명, 지난해에는 4092명으로 늘어났다. 금세기 들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약물과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이처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이유는 도핑 테스트가 강화된 탓도 있지만 부와 명예를 하는 선수들의 약물 복용에 대한 유혹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

최근 2003파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6회 연속 종합우승을 달성한 미국 육상계가 남녀 단거리 2관왕 제롬 영과 켈리 화이트의 약물복용 의혹으로 발칵 뒤집힌 가운데 금지약물의 종류와 부작용, 사례 등을 알아본다.

금지약물은 어떤 것이 있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사용을 금지한 약물은 크게 △펩타이드 호르몬제 △근육강화제 △흥분제 △진통제 △이뇨제의 5가지로 분류된다.

펩타이드 호르몬제는 각종 호르몬을 과다 분비시킴으로써 신체 기능을 증진시키는 약제. 남성 호르몬제, 성장 촉진제, 적혈구의 생성과 산소 운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 등 종류가 가장 다양하다. 그러나 이를 장기 복용하면 두통, 고혈압, 우울증, 이상 피로와 호흡곤란의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메이저리그 홈런왕 마크 맥과이어가 안드로스텐다이온을 상용했다고 해서 잘 알려진 근육강화제는 근육과 근력을 발달시키지만 사용자의 절반 이상이 간 기능 장애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흥분제와 진통제는 장기 레이스를 치러야 하는 프로 스포츠와 단기간에 효과를 보려는 선수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에페드린으로 대표되는 흥분제는 피로를 줄여주고 감각을 예민하게 한다. 에페드린은 감기약에도 포함돼 있어 선수의 의사와 무관하게 복용될 수 있다는 게 문제. 흔히 ‘대포 주사’로 알려진 진통제는 소염작용을 통해 통증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관절 약화를 초래한다. 지난해 아오모리 동계아시아경기때 백은비가 치과 치료를 받으면서 맞은 국소마취 주사에는 에피네프린이란 진통제가 함유돼 있었다.

이뇨제는 체급 종목의 선수가 사용하는 약제. 소변을 비롯한 체내의 수분을 강제로 빼내게 한다. 그러나 심장마비와 고혈압의 위험이 있다. 이밖에 금지약물에는 마약류, 술. 도핑 테스트를 빠져나가기 위해 사용하는 2차 약제 등이 있다.▽대표적인 사례

벤 존슨 등 약물스타 쓸쓸히 은퇴

금지약물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올림픽에서 9초79의 세계기록으로 남자 100m를 제패한 벤 존슨(캐나다)이 경기후 소변검사에서 스테로이드계 양성판정을 받아 금메달을 박탈당한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이후 수많은 스타들이 약물의 덫에 걸려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축구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는 90년 마약밀매 연루 혐의로 첫 조사를 받은 뒤 91년 코카인, 94년 에피드린 양성반응을 보여 월드컵에서 영구 추방됐고 3년후 쓸쓸하게 은퇴했다. 99년에는 육상세계선수권대회에서 남자 높이뛰기 세계기록 보유자 하비에르 소토마요르(쿠바)가 선수자격 보류판정을 받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때는 체조 요정 드레아 라두칸(루마니아)이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금지약물 복용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투포환 1인자 CJ 헌터(미국)는 대회 11일전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숨진 단거리 여왕 그리피스 조이너(미국)의 갑작스런 사망 원인도 약물 남용에 따른 후유증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멀리뛰기 4연패를 비롯, 올림픽 금메달을 9개나 딴 전설적인 육상스타 칼 루이스(미국)가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미국내 선발전에서 약물 양성반응을 보였다는 폭로도 나왔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한국에선 ‘육상’이진일 무심코 먹은 감기약이 ‘덫’으로

우리에게도 선수들의 약물복용은 남의 일이 아니다.

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 때 여자역도의 최명식이 체중감량을 위해 약물을 복용한 게 밝혀진 이후 국내 스포츠계에서 약물복용 사례는 잊을만 하면 다시 머리를 들곤 했다 남자육상 800m의 아시아기록 보유자였던 이진일. 그는 95년 감기약을 먹었다가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의 불시 도핑테스트에 걸려 4년간 자격정지를 받았다. ‘아시아 중장거리의 최강자’로 꼽혔던 그는 이 사건으로 전성기를 허송세월한 뒤 스러져버렸다. 8방콕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는 체조 선수 4명과 수영 선수 1명이 이뇨제 때문에 도핑검사에 걸려 망신을 했다.최근에도 지난 2월 열린 아오모리동계아시아경기대회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3000m 은메달과 1500m 동메달을 딴 백은비(24)가 무심코 치과치료를 받았다가 금지약물 양성반응을 받은 일이 있다.

국내선수들의 약물복용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무지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 운동수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심코 먹은 약이 문제가 됐다.

최근엔 대한체육회가 적극적으로 금지약물에 대해 교육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대표선수들은 약물복용 문제에 대해 비교적 깨끗한 편. 올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산하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5개 종목 33명을 대상으로 불시에 실시한 도핑검사에서도 모두 음성판정을 받았다.

문제는 일반 선수들. 최근 수영계에선 서울 시내 모 약국에서 조제한 약을 먹으면 도핑검사에 걸리지 않고 기록을 단축시켜준다는 소문에 선수들이 몰려들어 조사에 나선 일까지 있었다. 그만큼 선수들이 더 좋은 기록을 내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다. WADA 한국 대표인 김용승 한국체육과학연구원 박사는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대표선수들과 달리 일반선수중에는 의도적으로 약물을 복용하는 사례가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이들이 몰래 약물을 복용할 경우 대표선수들과는 달리 가려내기 힘들다. 도핑검사에 1인당 20만원이 넘게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선수들을 대상으로 검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프로 스포츠의 경우는 금지약물과 관련한 아무런 규제 규정이 없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난해 부산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프로야구선수 진갑용이 약물파동에 휩싸인 것을 계기로 금지약물 규정을 준비하고 있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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