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경주마라톤]“사랑의 끈 타고 따뜻한 情이…”

  • 입력 2003년 10월 26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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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시각장애인 이윤동씨(오른쪽)가 페이스메이커와 손목에 끈을 묶은 채 힘차게 달리고 있다. -경주=원대연기자
1급 시각장애인 이윤동씨(오른쪽)가 페이스메이커와 손목에 끈을 묶은 채 힘차게 달리고 있다. -경주=원대연기자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26일 동아일보 경주오픈 마라톤대회에서 3시간41분40초의 기록으로 풀코스를 완주한 순간 이윤동(李潤東·46·울산마라톤클럽)씨는 함께 뛴 동반주자(페이스메이커)와 힘껏 부둥켜안았다.

울산장애인복지회장인 그는 2m 앞 물체도 형체만 흐릿하게 알아보는 1급 시각장애인. 중학교 때 눈에 타박상을 입어 실명했다.

“어제 팔순 홀어머니께서 뇌중풍이 악화돼 의식을 잃었습니다. 오늘 대회에 참가해야 할지 한참 망설였습니다만 어머니께서 ‘잘 뛰고 오너라’고 하시는 것 같아 용기를 내 나왔습니다. 회원들의 격려도 많았고요.”

풀코스에 처음 도전한 이씨는 클럽 회원들과 지난여름 많은 땀을 흘렸다. 회원들이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단 몇 발자국도 달릴 수 없는 상황. 비장애인인 페이스메이커가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넘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이씨의 몸에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달리면서 지난날의 불행을 잊고 힘을 내고 싶었어요. 그러나 막상 도로에 나가 혼자서 뛰어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리 힘은 있는데 정말 안타깝고 제 자신이 무척 실망스러웠지요.”

이씨는 올 4월 울산마라톤클럽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달릴 수 있도록 눈이 되어 달라”고 호소한 것. 3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울산마라톤클럽은 기꺼이 함께 뛰기로 했다.

“이씨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우리만 건강이다 기록이다 하면서 열심히 뛰었지 한번도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함께 뛸 수 있는데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죠.” 이 클럽 이태걸(李太杰·48) 회장의 말이다.

이때부터 이씨는 클럽 회원들과 서로 끈으로 손목을 묶고 뛰었다. 매주 목, 토요일 울산 문수체육공원에 모여 달렸다. 이씨를 시작으로 시각장애인 17명이 합류했다. 6월 울산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서 이씨는 하프코스를 1시간40분에 완주했다.

“손목을 묶은 끈을 타고 따뜻한 정이 몸속으로 전달되는 듯합니다. 함께 뛰면서 도로 사정이며 주위 풍경, 세상 사는 이야기까지 들려주는 울산클럽 회원들이 너무 고맙지요. 연습을 많이 해서인지 풀코스가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새로 태어난 기분입니다.”

이씨의 눈 역할을 하는 페이스메이커는 풀코스 내내 잠시도 신경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오르막 내리막을 미리 알려주고 주위 상황도 꼼꼼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페이스가 흐트러지면 1km도 뛰기 어렵다.

“호흡이 잘 맞아야죠. 이씨의 숨소리까지 느껴야 합니다. 숨이 가쁘다 싶으면 속도를 좀 늦추고 내리막이면 속도를 좀 더 내자고 합니다. 오늘은 100% 호흡을 맞추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만 앞으로는 호흡이 척척 맞을 겁니다.” 이씨와 함께 손목을 묶고 뛴 울산마라톤클럽 배광조(裵光祚·47·애경유화 직원)씨의 말이다.

이씨는 “빨리 병원으로 가 완주 메달을 어머니 손에 쥐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울산클럽 소속 시각장애인 4명도 하프코스와 10km에 출전해 완주했다.

경주=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한발 한발 사랑” 1m에 1원 돕기 SK케미칼 울산공장 41명▼

소녀가장 전민경양(왼쪽)을 위해 ‘1m 1원 돕기’에 나선 SK케미칼 울산공장 SKY마라톤동호회원들이 응원 나온 전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경주=특별취재반

“소녀가장 민경이를 생각하며 달렸습니다.”

SK케미칼 울산공장 SKY마라톤 동호회원들은 26일 전민경양(11·울산중앙초등교5년)을 위해 동아일보경주오픈마라톤을 완주했다.

칠순의 할머니와 단칸방에서 정부보조금만으로 살고 있는 전양을 돕기 위해 나선 회원은 41명. 1m 달리는 데 1원씩 모으기로 한 것. 이 가운데 12명이 풀코스를 뛰었고 19명은 하프코스, 10명은 10km를 완주했다.

이들 외에 회사 동료들도 후원금을 내기로 약속해 27일 전양에게 전달할 금액은 300여만원.

SK케미칼의 봉사동호회 ‘아사모’(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임) 회장인 김창우씨(45·공무과 반장)는 “그냥 달리는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달리기를 하고 싶어 ‘1m 1원 돕기’ 아이디어를 냈다”며 “사랑을 어깨에 짊어지고 달린 뜻 깊은 하루였다”고 흐뭇해했다.

전양은 이날 한국복지재단 울산시지부 사회복지사와 함께 경주에 와 SKY동호회원들의 레이스를 응원했다.

경주=정재윤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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