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박영석 남극원정대가 19일 밤 11시20분(한국시간 20일 낮 11시20분) 남극 전초기지인 칠레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다.
지난 16일 밤 8시45분 인천공항을 떠난 지 꼬박 86여 시간의 긴 여정 끝에 남극 전초기지에 도착한 것.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경유해 칠레 산티아고, 푼타아레나스로 들어오는 비행거리만 2만2237㎞. 지구 한바퀴가 4만여㎞인 것을 감안하면 반 바퀴 이상을 돌아온 셈. 순수 비행시간만도 26시간이나 돼 대원들은 모두 녹초가 됐다.
푼타아레나스는 남위 53도에 위치한 남미대륙 최남단 도시. 20세기 초부터 남극 원정대의 보급기지로 유명한 곳이다.
거쳐왔던 오클랜드와 산티아고에서는 남반구 초여름을 맞이해 영상 20도의 따뜻한 날씨를 만끽했지만 푼타아레나스는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진데다가 강풍까지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는 훨씬 넘는 듯 했다. 남위 53도가 한국의 한겨울 추위와 맞먹으니 남위 80도 선에 가까운 다음 기착지 남극대륙 패트리어트 힐은 얼마나 추울까?
산티아고에서 현지시간 저녁 7시에 출발한 비행기 안에서 맞이한 남미의 첫 밤. 신기하게도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석양이 물들기 시작했다. 극지방의 특징인 밤에도 해가 떠있는 백야현상이 완벽하게 나타나는 곳은 남위 66도33분 이상.
원정대는 20일 먼저 항공화물로 보낸 썰매와 각종 짐들을 찾아 촬영, 장비, 식량 등 각자 맡은 바에 따라 썰매에 나눠 실을 예정이다. 마지막 점검인 셈.
남극 패트리어트 힐로의 출발 예정일은 25일. 경비행기로 1000여㎞를 가야한다. 비행 예정시간은 5시간에서 10시간. 이처럼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는 남극 기상이 악화되면 다시 돌아오다가 기상이 좋아지면 또다시 기수를 돌리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인들 박영석대장에게 "써(Sir)" 경칭▽
지난 16일 인천공항에서 가족들의 환송을 받고 10시간 30분간의 장거리 비행 끝에 도착한 첫 기착지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 인천공항을 출발할 때도 그랬지만 오클랜드에 도착해서도 대원들은 죽을 고생을 했다.
이곳에서부터 짐들을 항공화물로 따로 보내기로 돼있어 무려 1300㎏이나 되는 짐을 대원6명이 일일이 날라야 했다. 크고 작은 짐이 56개. 엄선에 엄선을 거듭해서 꼭 필요한 것만을 가져온 것이기에 실수로 한 개라도 잃어버리면 생명과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 그래서 짐 마다 꼬리표를 달아 몇 번이고 확인 작업을 했고 무거운 짐을 나르느라 대원들의 얼굴에 구슬땀이 연신 흘렀다.
오클랜드에서 대원들을 맨 처음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뉴질랜드 출신 탐험가 동상. 오클랜드 공항 입구에 1936년 10월16일 영국에서 뉴질랜드까지 첫 단독비행에 성공한 여성 비행가 쟝 바튼의 동상이 오른손을 높이 든 모습으로 서 있다.
비행기 안에서는 물론 오클랜드 공항에서 박영석 대장의 인기가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탐험대인 것 같은데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특이한 것은 뉴질랜드인 등 외국인들은 앞다퉈 박영석대장에게 질문을 해대는데 공항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그저 신기한 듯 박영석대장을 쳐다볼 뿐이었다. 박영석 대장이 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완등했고 이번에 남극점에 도전한다는 설명을 들은 이들은 그 자리에서 놀라움을 표시하며 곧바로 박영석대장에게 '써(Sir)'라는 경칭을 썼다.
뉴질랜드에서 이처럼 탐험가에 대한 존경과 관심이 높은 것은 지난 1953년 세계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48m) 등정에 성공한 뉴질랜드인 에드문드 힐러리경의 공이 크다. 아직 생존해 있는 힐러리경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5달러짜리 지폐에도 들어있다. 심지어 그가 졸업한 오클랜드 그랜마고등학교는 뉴질랜드인(키위)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명문고가 됐다. 그 학교 인근 지역의 집값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을 정도.
뉴질랜드 사람들의 탐험가에 대한 존경심은 박영석 대장을 포함한 대원들에게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한국에서 산악인이나 탐험가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나마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정도만이 정기적인 후원을 받고 있지 그 외의 유능한 산악인들이 어렵게 원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박영석대장은 "이래서 외국 나오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히말라야 8000m급 6개를 등정한 후배 오희준대원을 가리키며 "네가 14좌 할 때 즈음이면 상황이 많이 좋아질 거야, 명예는 얻어지는 것이지 쫓는다고 잡히는게 아니야"라고 한마디.
박영석 대장의 한국인 팬은 뉴질랜드에도 많았다. 대학 산악부 출신의 뉴질랜드 교민들이 오클랜드 이외의 타 지역에서도 달려와 짐을 날라주고 자신의 집에서 바비큐 가든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건강보조식품업을 하는 한 교민은 녹용 등을 한보따리 선물하기도 했다.
▽뚱뚱이들 때문에 11시간동안 곧추 앉아 비행▽
인천에서 오클랜드까지 비행시간은 10시간 30분. 오클랜드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1시간 10분. 양쪽 여정의 차이가 불과 40분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문화적 차이인지는 몰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
장거리 여행인 관계로 좌석을 뒤로 제치고 수면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인천~오클랜드는 자국기인 대한항공이라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오클랜드~산티아고의 칠레 국적기 란칠레에서 생겼다. 저녁 식사 후 좌석을 뒤로 제치자 뒤에 앉아있던 후덕하게 생긴 칠레 아주머니가 의자 등판을 두드리며 '절대 안된다'고 펄펄 뛰었다. 기자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뉴질랜드 청년도 의자를 제쳤다가 똑같은 난리를 겪었다. 5시간 정도를 비행했을 때 자리에 일어나서 비행기 내부를 훑어보니 정말 단 한명도 의자를 뒤로 젖힌 사람이 없었다. 뚱뚱한 사람들이 많은 탓에 의자를 뒤로 제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매너인 것 같았다.
결국 대원들은 11시간여를 화장실 한번 가지 못하고 곧추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푼타아레나스로 가는 국내선을 갈아타기 직전 공항 대합실에서 모두 쓰러져 잠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클랜드에서 짐을 항공화물로 보내긴 했지만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대원마다 항공사가 정한 60㎏의 짐(카고 백 2개씩)은 직접 챙겨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남미 공항의 세관 및 검역은 무척 까다롭다.
특히 음식물에 관한 것은 예외가 없을 정도. 그러나 아뿔사. 대원들이 직접 들고 간 짐 대부분은 남극점 원정길에서 먹을 건조식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덜컥 검역에 걸리고 말았다. 게다가 대원 중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칠레 세관원은 영어가 짧았다.
결국 손짓 발짓 끝에 '이것들은 남극에서 먹을 것이지 칠레에선 돈 주고 먹으라고 해도 안 먹는다'는 뜻이 서로 통해 벌금을 물거나 압수당하는 일을 면했다.
함께 비행기를 탔던 한 교민은 평상시 같으면 어림없는 일인데 탐험대라 세관원도 관용을 베푼 것 같다고 설명. 어휴 십년감수.
전창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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