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 영하 12도
풍속 : 초속 16.4m /최대풍속 : 초속 22m
운행시간 : 12:55 - 16:30(3시간 35분)
운행거리 : 6.2km (누계 : 55.1km)
야영위치 : 남위 80도22분 120초 / 서경 80도55분456초
고도 : 810m
새벽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이 블리자드로 돌변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듯 미친 듯이 불어 댄다. 오희준 대원의 아침식사가 파란 불꽃의 휘발유 버너 위에 올려졌다. 모두들 불가에 둘러앉는다. 밖은 광풍이 불어대지만 텐트 안은 별세상이다.
위성전화를 통해 e-mail을 검색하려다가 무엇을 잘못 건드렸는지 전화접속이 오류를 일으킨다. 대원들 중 컴퓨터 전문가도 없고 위성전화의 데이터는 더구나 전문적인 분야라서 속수무책이다. 별짓 다 해봐도 접속이 되지 않아 결국 한국에서 기술지원을 받은 메스코에 전화를 했다. 하지만 메스코의 서울사무소 이상륜소장과 기술지원 책임을 맡고 있는 전성익씨도 전화통화로 알려 줄 것은 다 알려준 듯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한다. 출발시간까지 미루며 노트북을 달래봤지만 소용없다. 운행을 마친 후, 다시 한국에 전화해서 해결하기로 하고 출발준비에 들어갔다.
바람 속으로 나섰다. 다행히 바람이 다소 주춤해졌다. 풍선처럼 날리는 텐트를 붙들어 썰매에 우겨넣고 겨우 출발한다. 정면으로 바람을 받으며 운행방향을 남쪽으로 잡았다. 눈 덮인 3개의 산봉우리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람과 함께 쓸려가는 눈가루들이 별똥별처럼 아름답게 흘러간다. 맨 앞에서 방향을 잡으며 썰매가 잘 끌리는 길을 찾아나서는 박대장의 동작이 자주 멈춰 선다. 조금이라도 남쪽을 향해 직선으로 가야한다. 그만큼 바른 방향판단과 방향유지는 남극탐험에서 중요하다. 눈 표면의 고른 면을 찾아 운행하는 것도 박대장의 주 임무중 하나. 썰매가 잘 끌리면 그만큼 운행속도도 빠르고 힘이 덜 드는 반면 울퉁불퉁한 곳으로 가면 힘은 힘대로 들고 썰매는 썰매대로 잘 끌리지 않는다.
문득 먼 지평선, 아니 설평선(雪平線)에 뭔지 모를 검은 띠가 나타났다. 저건 뭘까. 그것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다. 엄청난 눈가루를 동반한 블리자드가 대원들을 강타했다. 순간 풍속 초속 22m에 평균 초속 16m의 태풍급 블리자드. 우측면에 몰아치는 블리자드에 대원들은 몸을 휘청거리며 갈 지자 걸음을 걷는다. 썰매는 바람에 밀려 왼쪽으로 치우친 상태로 끌려간다. 결국 박대장은 운행을 멈추고 야영준비를 지시한다. 광풍 속에서의 텐트설치도 쉬운 일이 아니다. 다섯 명의 대원이 텐트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붙들고 폴대를 끼우는 등 30여분동안 사투를 벌인 뒤에야 겨우 눈바닥 위에 호텔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텐트 안, 대원들이 모두 들어오고 안도의 긴 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아침에 문제를 일으켰던 위성전송 시스템 점검에 나섰다. 다시 메스코의 전성익씨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전날 밤 11시30분까지 사무실에서 탐험대와 통화를 하며 안타까워하던 전성익씨가 이런 저런 방법을 제시하며 시스템 복구를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 풀죽은 목소리로 '혹시'하며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똑같이 해보라며 이방법이 최후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결국 전성익씨가 제시한 최후의 방법이 문제를 해결했다. 위성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텐트안은 환호성이 터졌다. 비록 탐험을 시작한지 5일째이지만 대원들은 앞으로 남은 기간동안 가족, 친구, 선후배와 이웃 그리고 이름모를 격려자들의 따뜻한 메시지가 무엇보다도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메스코의 전성익 대리님께 대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저녁식사 후 텐트 안,
박대장과 강철원대원이 담배 한 갑 내기를 한다. 내기에 결코 지는 법이 없는 박대장과의 내기는 하기 전에 결과가 뻔했다. 결국 예상대로 강철원 대원이 귀한 담배 한 갑을 박대장에게 헌납하고 말았다. 아마 박대장이 졌다면 우겨서라도 담배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참, 내기는 무슨 내기였느냐 하면 '풍속계를 입으로 불어서 수치가 누가 많이 나오느냐' 하는 것. 처음에는 기세 좋게 강철원대원이 이겼지만 결국 박대장이 '다시 해야 한다'고 우긴 끝에 다시 불어 본 결과 박대장이 이겼다. 아마 박대장은 이길 때까지 계속 불었을 것이다.
남극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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