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점 탐험]12월5일 6일째 화이트 아웃 계속

  • 입력 2003년 12월 9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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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 계속된 블리자드와 함께 화이트 아웃

기온 : 영하 16도

풍속 : 초속 13m

운행시간 : 07:45 - 13:50(6시간 05분)

운행거리 : 10.1km (누계 : 65.2km)

야영위치 : 남위 80도27분 548초 / 서경 80도56분141초

고도 : 867m

아침 텐트를 걷고 출발할 무렵, 전날부터 불던 블리자드에 실려 온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곧 화이트 아웃(white out)이 시작된다. 보이는 것은 모두 백색뿐이다. 발 딛는 설면의 높낮이가 전혀 분별이 되지 않는다. 썰매가 잘 끌리도록 길을 찾아다닐 수도 없다. 방향유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썰매가 옆으로 굴러 대원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들 맥 빠지는 운행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눈구덩이에 썰매가 빠져 아무리 당겨도 끌리지 않을 때는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대원 중 가장 썰매가 무거운 오희준 대원과 이현조 대원의 경우는 보기에도 안타깝다. 무거운 썰매를 끌면서도 뒤쳐지지 않던 두 대원이 오늘은 자꾸만 뒤로 쳐진다.

오늘도 앞잡이는 박대장이다. 한참을 앞서가며 방향잡기 위해 나침반을 꺼내들고 자주 멈춰 선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니 달리 도리가 없다. 나침반을 보기 위해서는 벙어리장갑을 벗고 얇은 장갑을 껴야 하는데 한두번도 아니고 추위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박대장이 생각해 낸 것이 '바람과 늑대 털의 상호작용에 의한 방향잡이 설(說)'이다. 남쪽을 기준으로 두시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봤을 때 오버자켓의 모자둘레에 달려있는 늑대털은 얼굴 바깥방향으로 날린다. 남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돌리다가 얼굴 우측의 늑대털이 시야에 들어오면 털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정남이라는 설(說)이다. 6시간이 넘는 운행을 화이트 아웃 상황에서 했는데 이 '늑대털 說'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12월 4일과 5일 좌표중 서경좌표 비교해보면 암)

방향은 늑대 털로 잡았다지만 발밑은 어쩔 수 가 없다. 울퉁불퉁 제멋대로인 설원이 그 모습을 화이트 아웃 속에 숨기고 보여주지 않자 앞서가던 박대장의 입에서 된소리가 자주 나온다. 그뿐인가. 대원들은 넘어지고 썰매는 구르고 '난리 부르스'다. 결국 운행을 멈추기로 결정한다. 날만 밝으면 설원의 상태가 좋지 않아도 시간 당 2,2km정도는 가는데 오늘은 영 속도가 붙지 않는다. 백색공간에 갇힌 기분이다. 갇힌 공간 속으로 바람은 인정사정 없이 불어 닥친다. 탐험시작 이후로 가장 추운 날씨. 우리탐험대와 같은 날 남극에 들어온 다른 원정대들은 비슷한 경로로 운행 중일 텐데 주위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길을 잘 가고 있겠지.

운행을 마친 저녁시간이면 몇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우선 젖은 장갑이며 양말, 모자, 신발 등을 텐트 안에 걸어놓은 빨래줄-대원들은 그렇게 부른다-에 널어놓고 버너를 켜는 동안 말린다. 대원별로 운행기록을 정리하고 자신의 옷과 장비를 점검한다. 먹는 일이야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고 꼭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탐험대의 총대장인 구자준 대장님과 전창기자가 발이 묶여 있는 패트리어트 힐에 안부전화를 하는 일이다. 두 분은 벌써 한국으로 갔어야 하는데 패트리어트 힐의 바람은 비행기의 접근을 5일째 거부하고 있다. 8시 경에는 푼타 아레나스의 A.L.E(원정대행사)에 전화를 걸어 탐험대의 위치와 대원들의 상태를 알려줘야 한다. 만약 2번 이상 연락이 없으면 조난으로 간주되어 수색이 시작되고 탐험은 끝이 나고 만다. 아주 중요한 일인 셈인데 행정담당을 맡은 꼼꼼한 강철원 대원이 짧은 영어로 간단한 통화를 매일하고 있다.

오늘부터는 박대장의 제안에 따라 긴 내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매일 운행거리를 근사치로 알아 맞추는 것인데 하루 10달러의 상금이 일자별로 누적된다. 남극점에 도달할 때 쯤이면 상금은 총 500달러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상금은 박대장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이런 내기는 대원들에게 재미를 줄뿐더러 사기도 높여주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정작 대원들은 시큰둥하다. 우선 춥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그저 먹고 자며 쉬고 싶으니까.

참고로 첫날은 박대장이 10.5km를 적어내서 1등을 했다.

남극탐험대 이 치상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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