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 영하 13도
풍속 : 초속4.4m
운행시간 : 06:45 - 15:15(08시간30분)
운행거리 : 23.4km (누계 :367.5km) /남극까지 남은 거리: 766.9km
야영위치 : 남위 83도 07분998초 / 서경 80도 14분 978초
고도 : 1,146m / 84도까지 남은 거리: 96.5km
탐험 19일째, 남위 83도를 넘어섰다. 운행을 시작한 후 3시간 30분만의 첫 휴식시간. GPS를 열어 본 박대장의 얼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야! 드디어 83도를 넘었다"고 외친다. 10시 10분 경. 탐험대원들의 표정도 일순간 밝아진다. 83도 선이 설원에 그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떤 단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이 대원들을 들뜨게 만든다. 남극점까지 매 1도를 넘어설 때마다 느끼게 될 희열이다. 물론 극점과 가까워질수록 그 의미와 기쁨은 더 커져 가리라.
83도를 넘었다고 좋아하며 쉬고 있을 무렵 출발부터 심상치 않던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남쪽 하늘은 완전히 구름에 가려져 있다. 분명 화이트 아웃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 또 다가오고 있다. 탐험이후 네 번째 화이트 아웃. 썰매를 끌고 있는 탐험대의 행렬이 화이트 아웃으로 들어간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정면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박대장이 바빠졌다. 사위를 분간 할 수 없으니 믿는 것은 나침반뿐이다. 멈춰서는 회수가 많아지며 '가다 서서 확인하고, 가다 서서 확인하고'를 반복한다. 오희준 대원의 썰매가 오리무중 속에서 사스트루기에 빠졌다. 썰매는 그 안에 갇혀 꼼짝하지 않는다. 아무리 잡아끌어도 나오려하지 않자 오대원이 두 손으로 앞부분을 들어 내놓고 끈다. 그제야 마지못한 듯 빠져나오는 썰매를 뒤따라가던 이치상 대원이 한대 걷어차고 싶지만 그냥 참는다. 그런 와중에 이대원의 썰매가 눈밭을 구르며 "배 째라"며 반항한다. 열 받는 순간이 계속된다. 어쩌랴. 참아야지. 운행 속도가 화이트 아웃으로 시야가 묶여 확연히 떨어진다. 박대장이 뒤처져 고전을 면치 못하는 대원들을 뒤돌아보며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일찍 운행을 종료한다.
텐트를 치고 갖는 여유로운 휴식시간, 육포와 오징어를 구어 먹고 차를 마시면서 저녁식사 전까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휴식을 즐긴다. 대화래야 대부분 먹는 얘기이다.
'탐험 마치고 한국 돌아가면 어디에 뭘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긴 꼭 가야한다'
'언제 어디서 먹었던 뭐가 맛 있더라'
대충 이런 얘기들이다. 매일같이 냉동 건조된 쌀과 마른 돼지고기, 마른 버섯, 마른 파, 건 어묵 등을 압력솥에 넣고 끓여 죽 비슷하게 만들어서 먹는다. 아침, 저녁 똑같은 메뉴다. 그러니 온갖 음식들에 대한 환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지 않을 수 없다. 탐험대가 가지고 온 식량을 가지고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먹는 것도 대원들의 관심사이다. 첫 작품은 음식솜씨 좋기로 평판이 나있는 박대장의 '오징어 국'. 마른 오징어를 물에 넣고 끓이다가 건조 김치국을 넣고 끓여내는데 매일 먹는 텁텁한 김치국보다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건오징어가 있는 한 오징어국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 저녁에도 오징어 국이었다. 다만 입술이 부르튼 박대장과 이치상 대원은 먹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다. 참다못해 결국 한 숟갈 떠 입에 넣어보지만 "으악" 소리치며 쓰라린 입술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난리 부르스'도 이만 저만 아니다. 밥그릇은 저만치 내동댕이 처져 나뒹굴고 있다.
두 번째 별미 요리사로 이치상 대원이 나선다. 다들 못 미더워한다. 좀 여유가 있는 간식용 스니커즈를 뜨거운 물에 넣고 녹인다. 쵸코바가 '핫쵸코 음료'로 둔갑한다. 못내 미덥지 못한 표정의 이현조 대원이 쭈뼛쭈뼛 맛을 보더니 '와 죽여준다'고 말한다. 다들 "꿀컥" 침을 삼킨다. 결국 오늘 저녁 마지막 음료는 핫쵸코 음료가 됐다. 입술에 약을 바른 박대장을 빼고는 다들 맛있게 마신다. 박대장은 얼마나 마시고 싶을까.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ㅋㅋ ㅎㅎ.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가 어제부로 800km 이내로 줄었다. 하루 20여km씩 걸으니 남은 거리에서 그날 걸은 거리를 빼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가까운 위도(지금은 84도)까지의 남은 거리에서 하루 운행한 거리만큼 빼는 재미가 한 없이 즐겁다. 적어도 대원들에게는 그렇다. 매일 반복되는 운행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 화이트 아웃 속에서 짜증나는 운행이 계속되었지만 바람에 날리는 눈은 오히려 대원들의 기분을 환기시킨다. 남극에서 눈이 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데 우리는 벌써 세 번째 내리는 눈을 맞는다. 눈은 캠프를 친 이후에도 계속 내리다 약간의 적설을 기록하고 그친다. 춥다고 느껴지지 않는 날씨. 그러나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해발 1,100m를 넘어 섰고 내륙으로 400km 정도 들어 온 상황이라 언제 남극의 혹한(영하 30℃~40℃)이 닥칠지 모른다. 블리자드와 화이트 아웃은 겪었으니 이제 추위만 남았다. 다행히 대원들이 지난 봄 북극 원정때 추위 경험이 많아 큰 염려는 하지 않고 있다.
남위 84도선을 기다리며 대원들이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루 중 가장 편한 시간이다.
남극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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