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 영하15.1℃
풍속 : 초속6.2m
운행시간 : 08:15-19:25 (11시간10분)
운행거리 : 33.7km (누계 :525.1km) /남극까지 남은 거리: 609.6km
야영위치 : 남위 84도 32분500초 / 서경 80도 49분 114초
고도 : 1,285m / 85도까지 남은 거리: 51.7km
▼운행거리 500km를 넘다!▼
크리스마스 이브, 고향에서 실려 온 많은 격려의 글들 중 대부분이 크리스마스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여기 남극에서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고 있다. 그것도 완벽한 화이트. 파아란 하늘아래 모든 세상이 하얀 은백의 세계, 이곳에는 캐롤 송도 없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지만 고향에서 전해져 오는 반가운 소식들 덕분에 대원들의 얼굴은 언제나 생기가 감돈다. 이런 날이라고 박대장이 대원들을 봐 줄 리 없다. 오늘도 33.7km를 걸었으니 적게 걸은 것은 아니다. 총 운행거리도 500km를 넘어섰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총 길이가 450km 정도이니 탐험대원들의 발걸음은 서울을 출발해서 대전, 대구 부산 찍고 다시 올라가 경주 쯤 되는 곳에 캠프를 차린 셈이다. 총 운행거리가 도상 직선거리 1,111km에 운행거리 약 1,200km. 그러나 실제 걷는 거리 1,450km정도가 된다. 아직 절반에 조금 못 미친 거리지만 속도가 붙고 있으니 수일 내로 절반을 넘어서리라.
크리스마스 특별선물로 박대장은 대원들에게 집으로 전화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현조 대원은 고향 전남 영광의 집에 계신 아버지께 '잘 있다'는 간단한 안부를 전한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만 받지 않자 조금 서운한 눈치다. 강철원 대원은 매형과 역시 간단한 통화를 한다. 이어 조카가 전화를 받았지만 강대원은 "남극에 와있는 삼촌인데 잘 지내냐?"는 살가운 말 한마디 없다. 결국 박대장에게 한소리 듣는다. 이치상 대원은 음성 금왕의 집에 있는 아내와 큰아이 건영이와 안부를 주고받는다. 오희준 대원은 '설날 하겠다'며 전화걸기를 사양한다. 조류 독감과 X같은 정치 얘기, 불황으로 연말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 등 한국 소식은 반가운 것이 하나도 없다. 남극점 탐험대에 격려 메시지를 보내주는 수많은 분들의 소박한 얘기만이 운행을 마친 대원들의 지친 몸을 풀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입술 부르터스의 상황은 좀 나아졌다. 매일 저녁 식사 때 유일한 반찬인 '조미김'이 오늘의 얘깃거리이다. 김에 묻은 소금이 입술 상처부위에 닿을 때의 따끔한 아픔을 호소하는 박대장과 김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렸을 때 통증을 호소하는 이치상 대원의 얘기에 다른 대원들은 쓴웃음을 짓는다.(오호 쌤통 ㅎㅎ ㅋㅋ ㄲㄲ) 자기일 아니라고 먹던 밥숟가락 놓고 배를 잡고 웃는 후배들이 얄밉다. 그러나 박대장과 이대원은 자신들이 생각해봐도 우스운 일이라 허허 같이 따라 웃고 만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푹푹 빠지는 설원을 가로지른다. 출발 후 5분, 대열을 멈추게 한 후 박대장은 발이 많이 빠지니 스키를 신고 운행하자고 한다. 대원들은 머뭇거리다 스키를 신었는데 200m쯤 가더니 멈춰 서서 스키를 벗는다. 그냥 걷는 것이 몸에 익어 스키를 신고 걷기가 오히려 불편하기 때문이란다. 박대장은 계속 스키를 고집한다. 운행 도중 몇 번의 경험으로 그나마 스키로 걷는 것이 안정돼 보인다. 집에 안부전화 하느라 출발시간이 늦었다. 8시 15분 출발. 아침나절 바람은 오늘도 손끝을 시리게 만든다. 시린 것을 잊기 위해 부지런히 앞사람의 뒤를 쫓는다. 추울 때는 휴식시간도 짧다. 먹을 것 먹고 마실 것 마신 후에 곧장 출발이다. 별다른 대화도 없다. 춥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오후 들며 바람이 자면서 날씨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풀린다. 똑같이 걷는데 목과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길은 빠지는 것으로 부족해 아예 사스트루기로 매복 작전을 치고 있는 듯 울퉁불퉁한 고랑을 가로 지른다. 운행 종료 한 시간 전, 마지막 파시코 음료와 비스켓으로 간식을 먹고 한 시간 후의 휴식을 생각하며 남은 힘을 다하여 열심히 걸을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더욱 심해져가는 눈 고랑은 마지막 먹은 간식의 기운까지 고스란히 앗아간다. 눈 고랑 사이에 겨우 텐트 들어갈 정도의 공간을 발견하고 운행을 멈춘다.
고된 운행을 마친 날일수록 저녁식사 후의 휴식시간은 달게 느껴진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남극점 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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