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 영하10.2도
풍속 : 초속 3m
운행시간 : 07:40- 17:10( 9시간30분)
운행거리 : 25.0km (누계 :550.1km) /남극까지 남은 거리:584.6km
야영위치 : 남위 84도 45분964초 / 서경 80도 47분 977초
고도 : 1,324m / 85도까지 남은 거리: 27.2km
어제 저녁부터 심상치 않던 하늘이 결국 아침에는 화이트 아웃으로 세상을 삼켜 버렸다. 남극에 온 후 네 번째 내리는 눈. 완전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이지만 대원들은 하나도 반갑지 않은 눈치이다.
07:40분 출발. 설사면의 높고 낮음의 구분이 전혀 되지 않아 출발부터 비틀거리는 대원, 눈구덩이에 빠져 안간힘을 쓰며 빠져 나오려는 대원, 여기저기서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엉망진창이다. 촬영 후 처져서 뒤따르던 이치상 대원은 사스트루기의 큰 구덩이에 빠졌다가 나오자마자 퍽 소리와 함께 엎어진다. '아이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운행 시작한지 얼마 후 진행방향인 남쪽 지평선 쪽으로 가는 띠처럼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듯 보이자 대원들의 얼굴표정이 환하게 바뀐다. 박대장은 "크리스마스를 남극에서 맞고 여기에 눈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얼마나 행운이냐. 아마 화이트 아웃도 곧 없어질 것이며 앞으로 좋은 일만 계속될 것"이라며 대원들을 격려한다.
어제까지 남위 85도에 51.7km 못 미친 상황. 내일은 85도를 넘어서고자 설령 화이트 아웃일지라도 꾸준히 운행을 계속할 예정. 파랗게 열리던 남쪽 하늘이 더 이상 열리지 않고 하늘의 문을 닫는다. 화이트 아웃 속에서 계속되는 고전은 대원 누구를 가리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눈 턱을 볼 수 없어 발이 걸려 넘어지고 썰매는 사스트루기에 빠지기도 하고 벌렁 드러눕기도 한다. 이치상 대원은 6번을 넘어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그 와중에도 왼쪽 무릎 통증을 호소한다. 말은 안하지만 시력이 0.1인 오희준 대원의 걸음걸이도 눈물겹다. 맑은 날에도 잘 안 보인다는데 오늘 같은 날에는 오죽할까. 오후 3시 휴식, 이대로 계속 운행하면 무리라고 생각한 박대장은 두 시간 더 운행한 뒤 오늘 운행을 종료하기로 결정한다. 좋은 날씨일 때 보다 서너 배는 더 힘들어하는 대원들은 크리스마스 날 예기치 않은 선물이라도 받은 듯 좋아하는 눈치들이다. 운행 종료 한 시간 전, 핫쵸코 음료를 한잔 씩 마시고 운행속도를 늦춘 썰매는 대열을 맞춰 화이트 아웃 속으로 전진한다. 운행 종료를 앞두고 무리하다가 불상사라도 나는 날이면 운행을 아니 한 것만도 못하다. 거기에다 비교적 규모가 큰 텐트를 치기위한 평평한 공간을 찾는 일도 화이트 아웃 속에서는 쉽지가 않다. 박대장은 약속한 운행종료 시간이 지나자 대원들에게 썰매를 놔두고 텐트사이트를 찾도록 한다. 15분여 후 50여m 밖의 강철원 대원이 여기가 좋겠다며 소리를 지르자 오늘의 야영지가 그곳으로 결정된다. '기울었네', '좁네' 따위의 말이 전혀 없다. 썰매로 그 공간을 포위하고 텐트에 폴대를 끼운 뒤 자리를 잡고 플라이를 씌운다. 바람에 대비해서 고정 끈을 썰매에 묶어 놓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원들. 힘든 하루였다.
텐트 안, 오희준 대원은 '빨간 날'이라며 박대장에게 특별식으로 라면을 끓이자고 한다. 물을 끓이는 동안 간식으로 마른 오징어와 육포가 버너 불에 구워진다. 누군가 몰래 감춰 온 소주라도 한 병 내놓는다면 지상 최고의 만찬이 될 터인데 아무도 그런 위대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쯧쯧, 낭만이라고는 눈꼽 만치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구...) '철들고 나서 이렇게 오래 술 안 먹기는 처음'이라는 박대장과 오희준 대원은 '그래도 건강에 좋은 것 아니냐'며 입맛을 다신다. 박대장은 푼타아레나스에서 올 때부터 계속된 설사로 오늘도 고생이다. 탐험기간이 늘어날수록 힘들고 지쳐갈 텐데 큰일이다. 준비해 온 설사 약을 박대장 혼자서 거의 다 먹은 상태라 '약 떨어지면 어쩌나'하며 걱정을 한다.
저녁을 먹고 버너 불을 켜서 물을 끓이며 운행 중에 땀에 젖은 옷가지를 말린다. 강철원 대원과 이현조 대원은 길게 누워 잠에 빠져있다. 아주 힘든 하루를 보낸 대원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없다. 빨간 날 크리스마스는 휴일인데 격려의 글이 들어 왔겠냐고 회의하던 대원들이 '들어왔다'는 이치상 대원의 말에 얼굴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이것이야말로 대원들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아니겠는가. 휴일인데도 대원들을 위한 동아일보 전창기자의 배려에 대원들 모두 고마움을 전한다.
'남은 2003년 마무리 잘 하시고 2004년 새해 설계 잘 하시길, 남극의 정기 모아 바라고 또 바랍니다.'
남극점 탐험대 이치상 대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