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 영하 15.6℃
풍속 : 초속 2m
운행시간 : 09:05-20:45 (11시간40분)
운행거리 : 31.4km (누계 : 831.7km)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 298.5km
야영위치 : 남위 87° 19.628′ / 서경 82° 37.622′
고도 : 2,323m / 88도까지 남은 거리: 74.9km
▼“역시 젊음이 좋은 것이여”▼
밤사이 바람이 멎었다. 불 듯 하더니 멎은 걸 보면 탐험대에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12월 20일 블리자드 이후 이렇다할 바람이 불지 않았고(어제가 최고 센 바람) 12월 25일 화이트 아웃 이후 날씨도 계속 맑고 좋다. 탐험대의 운행이 순조롭게 진행 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인 셈이다. 87도를 넘어서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바람의 방향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10시 30분 방향에서 불던 것이 오늘 정오부터는 우측후방 4시 30분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의 세기가 약해 오전의 운행 중에는 몰랐는데 첫 간식을 먹고 난 후 쉬고 있던 중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알았다. 이렇게만 불어 준다면 이젠 바람걱정을 많이 덜게 된다. 뒤바람은 운행에 도움이 된다. 다만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바람의 세기에 따른 '체감온도의 저하'만큼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아무튼 날씨는 우리 편이다.
아침하늘에 구름이 많다. 남쪽 하늘 낮은 곳에 지평선과 가까운 곳으로 띠처럼 열린 하늘을 빼면 하늘 전체가 구름이다. 그 많던 구름이 출발준비를 하는 동안 점점 걷히더니 출발 후 첫 휴식시간에는 동쪽으로 거의 물러갔다. 맑은 날에 바람까지 잠잠하다. 강철원 대원은 출발 때부터 아예 뒤로 빠졌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아 혼자서 천천히 걸어 야영지까지 오게 된다. 이런 운행이 오늘로 3일째다. 강 대원을 뒤에 두고 앞으로 나가는 대원들의 마음이 편치 않다. 오늘처럼 맑은 날에는 별문제 없지만 떨어져서 운행하는 동안 날씨가 나빠져서 화이트 아웃에라도 걸리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출발할 때부터 화이트 아웃이나 블리자드라면 같이 운행을 하면 되지만 운행 중의 날씨변화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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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처음부터 사스트루기(바람에 의해 눈의 표면이 깎인 지형)로 시작해서 사스트루기로 끝난다. 썰매의 볼멘소리가 극에 달한다. 턱을 넘어선 썰매는 다음 턱에 걸려서 움직이지 않고 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대원의 벨트에 충격이 전해져 배와 허리에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른다. 그러니 속도가 제대로 날 턱이 있겠는가. 사스트루기를 이리저리 피해서 가는 것도 한두 번이다. 돌아봐야 그 길이 그 길이다. 박대장의 발걸음이 자주 멈춰 선다. 가야할 지역을 살펴보고는 한숨에 섞인 쌍시옷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짧은 급경사에서 스키가 미끄러져 넘어지고, 뒤따라 미끄러져 내려 온 썰매에 받혀 나뒹굴고 오늘은 여러 가지로 재미가 없는 날이다. 날씨 좋은 것 빼고는. 아침 운행부터 자켓을 벗고 걸어도 될 정도로 바람이 거의 없다. 약간씩 부는 바람도 뒤바람이니 나쁘지는 않다.
간식을 먹던 중 이현조 대원은 "이제는 체력도 거의 바닥 난 상태라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드는 것이 느껴 진다"고 말한다. 이치상, 오희준 대원이 이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담배 맛도 달라 진다"는 오희준 대원의 얘기에서 피곤하고 지친 느낌이 묻어난다. 벌써 35일째의 강행군이니 그럴 만도 하다. 얘기는 하지 않지만 연장자인 박대장도 죽을 맛이다. 야영지에 들어서면 일기 쓰고 지도에 온 길을 표시하고 내일 운행을 잠깐 검토하고는 자리에 눕는다. 잠깐사이 코를 골며 잠에 빠진다. 밥이 다 되면 이현조 대원이 크게 불러 깨우고 밥 먹고는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는 금세 또 잠에 빠져든다. 나이 많은 게 죄라면 죄다. 막내 이현조 대원은 정리를 다 마치고 자리에 누워 자기 전에 일기를 꼭 쓴다. 대충이 아니라 꼼꼼하게 적는다. 기온, 바람의 세기, 온도 등 생각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운행일지를 적고 있는 이치상 대원에게 물어서라도 꼭 기록을 해 놓는다. "역시 젊다는 것은 좋은 것이여"
09:05분 운행을 시작한 지 11시간 40분만인 20:45분 운행을 멈춘다. 사스트루기 지역이라 텐트 칠 공간 찾기도 수월하지 않다. 겨우 텐트를 쳐 놓고 야영준비와 식사준비를 마치고나니 2시간 늦게 강철원 대원이 파김치가 돼서 캠프에 도착한다. 양쪽 허벅지에는 거즈붕대와 반창고로 도배를 했다. 움직일 때마다 옷에 쓸려서 아장아장 걷지 않으면 너무 아프다고 한다. 남은 일정이 아직 열흘이 넘는데 강 대원은 물론이고 대원들 모두 걱정이다.
해발 2,300m를 넘었다. 계속 올라오다보니 숨이 가쁜 것이 느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숨 가쁜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대원들이 모두 히말라야 경험이 많아서 고소증세 걱정은 안하지만 걸을 때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다.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가 300km 안쪽으로 들어섰다. 남위 87도를 넘으면서 대원들은 극점도달 날짜 카운트 다운(count down)에 들어가자고 하나 박대장은 남위 88도 이후로 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겪어 온 경험에 의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알고 날짜를 정해놓느냐는 것이다. 대원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날짜계산을 해 왔고 마음속으로 혹은 기록일지에 매일 하루씩 날짜를 줄여 나가고 있다. '남극점 도달'을 생각하면 할수록 흥분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오늘따라 대원들이 쉽게 잠에 빠져들고 코까지 드르렁 드르렁 곤다.
남극점탐험대 이치상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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