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을 꿈꾸며 무작정 상경했던 소년. 그가 불혹의 나이에 동양챔피언에 도전한다.
1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범아시아복싱협회(PABA) 슈퍼라이트급 타이틀매치를 벌이는 정경석씨(40). 상대는 19세나 어린 더디 샤이 바하리(21·인도네시아)다. 정씨는 국내 최고령 도전자, 게다가 상대는 21전(11KO) 전승을 달리고 있는 무적의 챔피언이지만 겁나지 않는다. 오히려 활활 투지가 타오른다.
마흔이면 링을 떠나고도 한참 지났을 나이. 그런데도 그는 왜 아직 링에 남아 있을까.
전북 전주가 고향인 정씨는 17세 때 맨주먹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12남매의 장남.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었던 그에게 세계챔피언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던질 유일한 탈출구였다. 낮에는 중국음식점 배달원을 하고 밤이면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두드렸다. 그러나 꿈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프로복서와 스파링을 하다 흠씬 얻어맞고 코뼈까지 부러졌다.
게다가 발등의 불은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올망졸망한 동생들을 떠올리면 샌드백이나 두드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글러브를 벗고 미친 듯이 돈 버는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10여년. 경북 경산에 음식점을 냈다. 종업원이 18명이나 되고 체인점까지 거느린 작지 않은 규모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젊은 시절의 꿈이 떠오르더라고요. 다시 체육관에 나갔습니다.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를 때는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더라고요.”
2000년 경북 도민체전이 열렸다. 복싱하는 것을 아는 주변에서 출전을 권유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간 게 결승까지 진출. 스스로도 놀랐고 주변도 놀랐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2001년 프로복싱 웰터급 신인왕전에 나선 게 37세 때. 한번만 이기면 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전 전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 그동안 내 삶은 언제나 도전과 좌절, 극복의 연속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는 것은 창피하지 않다. 고난에 맞서 싸우는 투지야말로 삶의 원동력이 아니던가.”
그랬기에 그는 결승에서 판정패하고도 복싱을 계속했다. 그의 프로 전적은 8승(4KO)2패, 현재 한국랭킹 2위다.
이번 챔피언 도전은 23년 전 품었던 꿈을 다시 펼치기 위한 시작이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뜨겁게 되지피는 열정이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 어려움이 닥쳐도 복싱을 그만두지는 않을 생각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에 어엿한 사업체의 사장인 그가 마흔살에도 복싱을 하는 이유다.
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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