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 : 영하 23.7℃
풍속 : 초속 3m
운행시간 : 08:45-23:00 (14시간15분)
운행거리 : 31.5km (누계 :1129.8km)
야영위치 : 남위 90° (남극점)
고도 : 2,835m /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 00.0km
더 이상 걷지 않아 행복하다!
뜬 눈으로 짧은 밤을 보낸 대원들은 아침식사로 마련된 죽을 평소의 절반도 먹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치는 것과 출발준비를 동시에 진행한다. 양말 한 켤레를 신는 것도 신중한 모습이다. 오늘은 남극점까지 가야하는 날이고 탐험이 종료되는 날임을 대원들은 잘 안다. 그런데 밖의 날씨가 수상하다. 바람이 거칠고 화이트 아웃이 밤사이 와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안심할 수 없는 것이 남극의 상황이다. 그런 것에 상관없다는 듯이 대원들은 평소처럼 출발준비를 한다. 오히려 몸동작이 가볍다. 9시 예정에서 15분 앞당겨 8시 45분에 박대장의 말 한마디 말과 함께 출발이다. “남극점의 별을 따러 가자!”
사스트루기는 이미 다 지나 온 것으로만 알았는데 화이트 아웃 속에서 5시간이나 계속된다. 어제의 긴 운행의 여파로 대원들의 몸동작이 느리기만 하다. 그냥 보고만 있을 박대장이 아니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대원들에게 한마디 빼놓지 않고 한다. 극점이 코앞인데 힘들 내라고. 그리고 나서의 운행 재개는 거짓말처럼 설원의 상태가 좋아졌다. 썰매가 잘 끌리니 걸음이 빨라진다. 남쪽 하늘의 푸른빛이 넓게 퍼지며 등 뒤에서 해가 비친다. 바람도 거의 잔다. 힘든 마지막 날을 예상했는데 남극점에 가까워 오자 남극의 여신이 우리 탐험대를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나보다고 속으로 감사히 생각한다. 남극점 26km전에 극점기지의 돌출부위가 어렴풋이 보였다 사라지고 설원을 서둘러 가로지르다 보니 13km쯤에서 남극점의 기지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대원들의 환호성과 환한 모습이 잠시 멈춘 발걸음과 함께 ‘이제 거의 왔다’는 안도감으로 전해진다. 조금씩 극점에 가까워질수록 걷기보다는 극점기지와 얼마나 가까워 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드는 일이 잦아진다. 수평의 설원 13km는 결코 짧은 길이 아니다. 수평 설원위의 기지는 아무리 걸어도 그대로이다. 분설에 속도가 나지 않으니 힘은 들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시간은 정해져 있다. 오후 12시 이전에는 남극점에 도착해야 44일 만에 끝낼 수 있게 된다. 촬영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된다. 디지털 카메라는 벌써 얼어서 사용 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은 오후 10시를 향하는데 탐험대원들은 극점기지의 거대한 규모를 초라하게 만드는 너른 설원 위에서 분설을 헤치며 힘겨운 마지막 투쟁을 하고 있다. 결국 박대장은 촬영이 시간을 지체하므로 일단 남극점으로 빨리 가는 것으로 운행결정을 한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 모를 고압전선 아래를 지나 주 활주로 주변의 비상 활주로를 지난다. 활주로는 국제공항 규모다. 넓고 길다. 신호등을 지나 극점표시가 어디인지 확인하며 트윈 오터(경비행기)와 그 주변의 캠프촌으로 향한다. 시야에 만국기가 들어오고 그 한 가운데 은구(銀球)가 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한다. 캠프에 있던 사람들과 남극점기지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어디에서 왔는지’ ‘며 칠이나 걸렸는지’ 그리고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한다. 남극점으로 들어선 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은구에 머리를 묻고 상념에 사로잡힌 박대장과 얼싸안고 감격 스러워하는 오희준, 이현조 대원, 그런 모습들을 촬영하고 있는 이치상 대원의 무엇인가로부터 해방 된 듯한 표정. 누구 할 것 없이 남극점 도달의 소감을 “더 이상 걷지 않아서 좋다”고 한마디씩 한다. 남극점의 아문젠-스코트 기지에서 걸어 나온 극점 메니저 피터씨의 친절한 안내로 지도상의 남극점으로 안내 된다. 은구에서 50여m 떨어진 곳에 1911년 12월 14일 아문젠과 1912년 1월 17일 스코트가 다녀갔다는 입간판과 그 앞 2m 지점에 세원 진 쇠막대가 바로 남극점이다. 쇠막대 위에 gps를 올려놓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남위 90도를 나타낸다. 비로소 남극점을 확인하고 다시 환호성을 지를 대원들과 축하해 주는 남극점의 이방인들. 무슨 전생의 인연이 있기에.
운행 중반까지 잘 따라오던 강철원 대원이 늦자 먼저 도착한 4명의 대원들은 옷을 입은 채 텐트 안에서 강대원을 기다린다. 초조, 불안 그리고 얼마 후, 대원들 도착 후 1시간 30분만에 강대원이 은구에 도착해 있다. 모두 뛰어나가 강대원을 반긴다. 은구에 머리를 기댄 채로 미동도 하지 않던 강대원이 박대장이 다가가자 끌어안고 큰 소리로 흐느낀다. 숙연해진 분위기가 계속될 것 같아 카메라를 돌리고 있던 이치상 대원이 한마디 한다. “철원아 여기 남극점 아냐” 남극점 표시막대로 옮겨가서 무사히 모두 모인 대원들이 다시 환호한다.
지하에 설치된 아문젠-스코트 기지는 설면위로 유리로 된 돔이 드러나 있고 그 위에 성조기가 걸려 있다. 눈의 압력으로 점차 변해가는 기지를 대신할 새로운 건물을 극점 옆에 짖는 공사가 한창이다.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다. 비행기가 운송수단이고 추운-세상에서 가장 추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여유로운 표정들. 전송할 사진 촬영을 마치고 기지 안으로 초대되어 향긋한 커피와 과자를 대접받는다. 기지의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다. 책상위에 놓인 과자를 캠프로 가서 먹으라며 건네주는 손길에 오래 된 듯한 우정을 느끼게 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대원들의 요구에 직접 따라 다니며 편의를 봐준다. 강철원 대원이 기지내의 의사에게로 안내되어 처음 보는 그들 걸어서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치료를 해준다. 이현조 대원은 식량 창고를 메니저와 함께 다녀온다. 눈 속에 파묻힌 비상식량 창고를 파헤치고 간단한 과자만을 챙겨오며 출발 전 대행사의 얘기와는 너무 다르다며 씁쓸해 한다. 사람 먹으라고 저장해 둔 식량이 아니라 먹다가 버리고 간 것을 묻어 둔 것이다. 전화로 약속했던 먹을거리와 탐험기간 내내 가장 고대하던 위스키의 행방에 대해 책임지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화가 치민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위스키는 무지 화가 난다.
지난 해 11월 30일 허큘레스 출발한지 44일 만에 탐험대원 5명은 쉽지 않은 여정을 남극점에서 마쳤다. 일그러진 얼굴과 망가진 몸으로 이제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만으로 편안한 표정이 넘친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여유로운 전화통화를 하고 대원들끼리도 즐거운 대화가 오간다. 남극점 대원들이 남극점에 도착해서 얻은 것은 진정한 ‘자유’이다.
2004년 1월 12일 오후 11시에 한국 남극점 탐험대원 5명의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에필로그
오늘로 남극점탐험대 인터넷 중계가 종료됩니다. 탐험기간 내내 중계를 맡았던 저는 네티즌 여러분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탐험기간이 늘어날수록 누적된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점점 무성의해지는 글을 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무엇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다만 그런 와중에 남극점에 와서 탐험 종료를 했다는 사실로 모든 허울을 덮고자 합니다.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끝!
탐험대 이치상 대원
▼탐험을 마친 박영석 탐험대장의 말 ▼
그 동안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과 네티즌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의 힘으로 남극점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이라 확신합니다. 남극점 도착 순간 지난 봄 북극원정에 실패하고 텐트 안에서 말없이 울던 생각이 납니다. 실의에 빠져 서울에 도착하여 공항을 나서는 순간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공항에 나와서 패장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NC SOFT의 김택진 사장님이 특유의 미소로 다가와 “고생 많으셨죠. 힘내십시오. 다시하면 됩니다” 이 말은 정말 눈물이 핑도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한마디 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걸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의 도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헤이하고 아니란 마음 따위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꿈은 도전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내년 봄 다시 북극에 도전합니다. 북극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끝으로 못난 대장을 끝까지 믿고 따라 준 용맹스럽고 자랑스런 이치상, 강철원, 오희준, 막내 이현조 등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믿고 지켜 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남극점탐험대장 박 영석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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