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특집]1만7240Km 건너온 남극편지

  • 입력 2004년 1월 19일 16시 38분


남극 대륙에 있는 포터소만의 빙하와 프로렌스 누나탁(작은 바위산).영롱한 햇빛과 만년설이 어울려 신비를 자아낸다. 남극 대륙에서 활동하는 세종기지의 대원들은 명절이 되면 1만7000여Km 떨어진 고국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사진제공=한국해양연구원
남극 대륙에 있는 포터소만의 빙하와 프로렌스 누나탁(작은 바위산).영롱한 햇빛과 만년설이 어울려 신비를 자아낸다. 남극 대륙에서 활동하는 세종기지의 대원들은 명절이 되면 1만7000여Km 떨어진 고국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사진제공=한국해양연구원
《이토록 멀리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부부가 세상에 또 있을까. 남극 세종기지 정상준 대원(39·기계설비)과 아내 문은자씨(36·전북 전주시)는 1만7240km 떨어져 있지만 부부의 사랑은 변함없이 뜨겁고 애절하다. 설이 되니 정 대원은 아내와 딸 금주(6), 아들 호석(생후 10개월)이 더욱 그립다. 제17차 남극과학연구단 월동연구대로 지난해 11월 출국한 정 대원은 올 12월 귀국 예정. 그가 아내에게 그리움에 젖은 편지를 보내왔다.》

사랑하는 은자씨. 아니 여보.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오.

지난해 11월 19일 새벽 집을 나설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 당신 눈물 흘리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또 눈물 흘리게 하는구나. 또 몹쓸 짓을 하고 있구나. 나도 남들이 볼까봐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몰래 눈물을 닦았어.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어. ‘내 옆자리에 당신과 애들이 함께 있고 우리가 지금 여행을 가는 거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그런 날이 오겠지? 꼭 올 거야. 그렇지? 함께 있을 땐 바쁘다는 핑계로 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 한번 못하고…. 올해 귀국하면 꼭 제주도 여행가서 우리 네 식구 근사한 사진도 찍자.

얼마 안 있으면 설인데, 당신의 옆자리에서 금주 호석의 아양을 받아주어야 할 이 사람은 머나먼 곳에 있네. 여기 남극은 설이라는 말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야.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어.

설만 되면 가족들의 만남, 행복하고 따뜻한 이야기들, 아버지 어머니의 흐뭇해 하시는 모습, ‘누가 더 세뱃돈 많이 받았는가’ 비교해 보는 조카들, 모든 것이 그립고 보고 싶어.

호석이 녀석은 이제 10개월이 됐지? 기어 다니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인데, 그 모습이 보고 싶다. 아빠의 빈자리를 금주가 대견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 예쁘고 책도 많이 읽고, 또 호석이도 잘 돌봐주고….

얼마 전 금주와 호석이가 모두 감기 걸려서 여러 날밤을 번갈아 등에 업어 재운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지. 먼 훗날 애들이 커서 이 아빠의 선택이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해 주겠지? 귀국해서 호석이를 안을 때 녀석이 ‘누구지?’ 하는 표정을 지을까봐 벌써 걱정이 돼. 호석이한테 아빠 사진 좀 많이 보여주길 바라.

전재규 대원의 조난사고 후 여기 대원들은 서로를 감싸고 배려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어. 전 대원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우리를 똘똘 뭉치게 하고 있지. 사고 며칠 전 이런 일이 있었어. 식당일을 도와주고 있는 고인에게 요리담당 대원(Cook man)이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말통(18L) 식용유’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전 대원이 ‘말표 식용유’로 잘못 알아듣고 한 시간 동안 찾아 헤맸지. 그가 지금도 옆에 있는 것 같아. 때 묻지 않고, 여리고, 학구파였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에는 중국기지 대원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커다란 고래와 마주쳤어. 내 바로 앞에서 새까만 물체가 솟아올랐고 우리 보트가 튀어 오르면서 난 뒤로 나자빠질 뻔했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조금만 배가 앞서 나갔더라면 아마…. 생각만 해도 무섭고 끔찍해.

난 양 발목에다 1.3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니면서 체력관리를 하고 있어. 이곳에선 행동으로 옮기는 자만이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허송세월만 하고 돈만 조금 버는 것밖엔 남지 않아. 한 가지라도 확실히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너무 너무 사랑하는 당신.

금주가 “아빠 올 날이 가까워지니까 즐겁다”고 말한 게 자꾸 생각나. 사랑하는 당신하고 귀여운 애들이 있으니 내겐 얼마나 위안과 힘이 되는 줄 몰라. 우리 조금씩 힘을 내서 참고 이겨내자.

설날에 복 많이 받고, 내년 설은 꼭 함께 보내자. 우리 네 식구 모두.

사랑해.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남편이.

▼전주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당신 떠난 뒤 채 식지 않은 찻잔을 만지며 북받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벌써 해가 바뀌었네요.

아빠를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하는 우리 딸 금주는 유치원에서 그림 그릴 때는 아빠의 얼굴을 가장 먼저 그려요. 요새는 호석이를 안아주고 얼러줄 때 금주가 전에 하지 않던 어린 짓을 해서 당황하기도 하지만, 금주라고 왜 마음의 빈 곳이 없겠어요. 호석이는 웃을 때면 하얀 이 4개가 보여요. 무릎으로 집안 구석구석 기어 다니고 두 손 마주치며 짝짜꿍도 잘 해요.

얼마 후면 설이네요.

한번도 객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당신.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발전을 꾀하고 싶다고 했지만 당신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근데 지금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당신에게서 연애편지 받는 기분도 괜찮더라고요.

요즘엔 TV에서 ‘남극’ 소리만 나와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하지만 나 스스로 더 씩씩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요. 집 걱정 말고, 목표한 대로 열심히 배우고 경험하고 더 멋진 사람이 되어 돌아오세요.

이번 설에 부지런한 우리 남편은 무엇을 소원할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랑 같지 않을까 생각해요. 우리 가족 건강하게 다시 만나는 거….

당신이 보고 싶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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