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는 남극점에 도달한 뒤 칠레를 거쳐 전날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그는 짐을 풀자마자 이곳에 거주하는 힐러리경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의 비서는 “힐러리경이 노환 때문에 일절 외부인을 만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사실 그는 외출할 때도 산소마스크를 쓰는 등 몸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가. 순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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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고 이번에 남극점까지 갔다고? 그렇다면 만나봐야지”라며 힐러리경이 비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박씨의 면담요청을 받아들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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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박씨가 처음 에베레스트에 오른 게 93년이니까 이들은 40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세계최고봉에 선 사이. 힐러리경은 간간이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정신은 또렷했고 박씨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박씨로부터 그간의 활동을 담은 기념우편엽서를 건네받고 “앞으로 북극점만 밟으면 세계에서 처음 산악그랜드슬램을 완성하는군. 그런데 다 끝낸 다음엔 뭘 할 계획인가”라고 물었다. 박씨가 “아직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남극점 원정 중 동상에 걸려 군데군데 검은 흉터가 생긴 박씨 얼굴을 가리키며 “많이 추웠지? 나도 예전에 남극에 갔을 때 기억이 나네”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힐러리경이 남극대륙을 횡단한 것은 근 반세기 전. 박씨는 도보로 남극점을 밟았지만 그는 1957년부터 이듬해까지 농장용 트랙터를 타고 횡단했다. 힐러리경은 “당시만 해도 남극대륙 횡단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트랙터 회사에서 후원을 해줘 시도했었지. 그때는 방한복이 시원치 않아 엄청 추웠어”라고 기억을 되살렸다.
나이 얘기도 나왔다. 박씨가 마흔한살이라고 하자 힐러리경은 “탐험가에게 마흔하나는 체력도 있고 경륜도 쌓인 황금 같은 나이”라고 격려했다. 그는 또 “정상에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 탐험가의 도전정신에서 나는 희망을 찾는다”며 박씨를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동석한 기자가 질문 하나를 던졌다. “아직도 함께 올라간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힐러리경 중 누가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는지 논란거리인데요.”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아내 준 힐러리 여사가 책 한 권을 집어들며 “그 대목이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읽어보라”고 했다. 에베레스트 초등 50주년이었던 지난해 증보판으로 펴낸 책으로 제목은 ‘정상으로부터의 조망(View from the summit)’. 이 책에서 힐러리경은 에베레스트 정복의 순간을 이렇게 썼다. ‘막판 2시간30분 동안 내가 앞장을 섰고 정상도 내가 로프 한개 길이만큼 앞서 올랐다. 텐징 노르게이의 입장을 생각해서 동시에 오른 것으로 한 게 나중에 문제가 됐다.’(텐징도 그의 자서전 ‘설산의 호랑이’에서 ‘내가 자일뭉치를 들고 2m 뒤에서 힐러리를 따라 올라갔다’고 했다. 텐징은 또 ‘힐러리가 크레바스에 떨어졌을 때 내가 자일을 확보해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힐러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썼다. 힐러리경도 이 부분에 대해 “당시 자일이 팽팽해지지 않았다면 난 추락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힐러리경은 후배 산악인과의 대화가 즐거웠는지 박씨의 등을 두드리며 “마이 주니어(내 아들 또는 후배)”라고 말하기도 했고 헤어질 때는 불편한 몸으로 현관 밖까지 나와 배웅을 해줬다. 그는 박씨로부터 인삼차와 칠보로 장식한 걸개를 선물로 받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한편 박씨를 비롯한 5명의 남극점원정대원들은 5일 오전 6시50분 대한항공 8828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오클랜드=전 창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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