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가까이 공사장 막일을 하며 버텨온 세월. 도전기회가 없어 몇 년을 무작정 기다리기도 했다. 막막했다. 링 위에 오르기도 전에 쓰러질 수도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더 큰 싸움이었다.
지난 11일 적지인 영국 런던에서 마이클 브로디(29)를 7회 KO로 꺾고 WBC 페더급 세계 챔피언에 오른 지인진(31)의 삶이 그랬다. 그는 2002년 7월 최요삼의 타이틀 상실 이후 노챔프국이던 한국에 다시 챔피언 벨트를 안겨주었다.
지인진이 프로에 데뷔한 것은 91년. 세계챔피언이 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회한이 컸기 때문일까. 16일 서울 관악구 봉천2동 대원체육관에서 만난 지인진은 “그동안의 고생이 떠올라 기쁨 보다는 서러움이 먼저 밀려왔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 글러브를 낀 것은 당곡중 1학년 때. 당곡고교 때까지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한 그는 고교졸업 후 은사인 신귀항씨의 권유로 프로에 데뷔했다. 생활보호대상자일 만큼 형편이 어려웠기에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전 같으면 개인 스폰서가 나타나 운동에만 전념하도록 후원해줬을 텐데 복싱 열기가 사라지면서 그것도 안 되더라구요. 한국챔피언이 되고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운동을 쉬는 날이면 공사장으로 막일을 나갔다. 벽돌도 나르고 청소도 하는 잡역부 생활이었다. 1995년 동양챔피언에 오른 뒤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공사장 막일은 3년 전까지 계속됐다.
95년 동양챔피언을 반납했다. 세계챔피언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강력한 왼손 훅을 구사하는 그의 기량은 90년대 후반 절정에 달했다. 문제는 갑자기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사태. 경기 후원자가 나서지 않아 도전기회를 좀처럼 잡을 수 없었던 것.
2001년 7월 첫 기회가 왔다. 세계챔피언인 멕시코의 강타자 에릭 모랄레스의 지명도전자가 된 것. 동양챔피언을 반납한지 6년만이었다. 그러나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지인진은 판정패했다.
두 번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출중한 기량을 갖춘 그를 두려워해서인지 아무도 선뜻 도전자로 받아주지 않았다.
“막막했어요. 세월은 자꾸 가는데…. 복싱을 그만두면 사회에서 폐인이 되지는 않을까 무서웠어요. 난 복싱밖에 모르니까요. 친구들이 ‘네가 사회를 아냐?’고 물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복싱에서 실패하면 다른 일을 해도 실패할 테고, 복싱에서 성공하면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지요.”
세계랭킹 1위에 재복귀한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모랄레스가 슈퍼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리며 챔피언벨트를 반납해 공석이 된 것.
이에 따라 그는 지난해 10월 런던에서 브로디와 챔피언 결정전을 벌여 판정승했으나 스코어카드 오류라는 석연찮은 이유로 무승부로 번복됐다. 그리고 이번 재대결에서 그토록 그리던 챔피언에 올랐다.
“고생만 하시다 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경기 이틀 전 꿈에 나타나 웃고 가셨어요. 이달 초 아들도 태어났고…. 말없이 저를 안아주시던 어머니, 그동안 운동한다고 소홀히 했던 집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챔피언이 되면서 지인진은 오랜만에 목돈을 만졌다. 페더급은 WBA챔피언인 멕시코의 마르케스 등 슈퍼스타들이 포진하고 있는 황금 체급. 마르케스와의 통합전이 성사될 경우 지인진의 대전료는 역대 국내 최고액인 50만달러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나이는 들었지만 대신 경력이 있잖습니까. 이왕 시작한 것이니 결실을 보고 싶습니다.”
지인진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다. “한국에는 훌륭한 복서가 많지만 여건이 너무 어렵습니다. 이들이 용기를 갖고 운동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지인진 프로필▼
△1973년 서울 생.
△1991년 프로데뷔
△1994년 밴텀급 한국챔피언
△1995년 밴텀급 동양(OPBF) 챔피언
△1995년 밴텀급 반납 후 페더급으로 체급 올림
△2001년 에릭 모랄레스(WBC 페더급 챔피언)에 판정패
△2003년 마이클 브로디와의 WBC페더급 챔피언결정전 무승부
△2004년 마이클 브로디와의 재대결 7회 KO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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