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기정' 그 이름 석자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숙명처럼 얽혀 각인되었다. 선생께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신 것이 1936년 이었고 내가 1934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3살 때의 쾌거였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6살 때부터 그의 이름은 신앙처럼 나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자란 동향의 선생은 고향의 자랑이요, 우상이었다.
학교에서 달음박질을 할 때면 잘 뛰는 아이의 별명은 늘 손 기정 이었다. 그 분은 어릴 때 두부를 많이 먹었다더라, 연습할 때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었고, 매일 새벽마다 백리를 뛰었다더라 하는 전설이 우리들의 어린 세계를 지배했다. 그때 나는 올림픽이 무엇인지, 마라톤이 모든 경기의 꽃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일장기 말소사건이 어떤 일이었는지 등에 대해 몰랐었고 다만 손 기정 선생이 일본 사람들을 물론 전 세계에서 1등이었다는 사실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해방 후 이북에서 공산당에 쫓겨 38선을 넘어 서울에 와서 공부하면서부터 그 때의 일들을 선생님으로부터 소상히 들어 알게 되었다. 인연이란 이런 것일까? 선생은 양정고교 대선배가 되었다. 고향 선배, 학교 선배. 양정 졸업생들의 자랑은 베를린 올림픽의 영광을 상징하는 교정의 월계수였다. 나는 고교시절 핸드볼 선수였기 때문에 육상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그 후 핸드볼 선수로서 전국체전에 3번 출전함으로써 체육인의 대열에 끼게 되었고,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늘과도 같은 손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1985년에 대한 체육회장직을 맡게 되면서 나는 손 기정 선생을 직접 모시게 되었다. 나는 주례를 설 때나 어떤 곳으로부터 강연초청을 받았을 때 빠뜨리지 않는 말이 있다. '외길 한 평생'. 평생 한 길을 가는 진실된 삶은 위대한 것이며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요, 철학이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면서 외길로 정진하는 그 진지한 삶의 모습. 자기의 길, 자기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정상을 정복하는 그 위대함에 나는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한다. 선생의 마라톤 외길 한 평생. 우리 모두의 자랑이요, 존경의 대상인 것이다.
선생이 평생을 바쳐 쌓아올린 염원이 지금에 와서 그 열매를 맺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지금도 후배들의 쾌거를 직접보고 격려할 수 있는 건강을 누리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당신께서 36년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셨지만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가슴에 달았다는 그 통분을, 후진들이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하는 순간을 지켜봄으로써 망국의 한을 푸셨을 것이다.
해방 후 보스턴 마라톤에서의 우승, 아시안 게임에서의 우승 등 값진 일들이 많았으나 올림픽에서의 우승은 선생의 쾌거로부터 56년 뒤인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 영조 선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때 나는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서 오늘의 마라톤을 키워온 코오롱 그룹의 이 동찬 회장, 육상 경기연맹 박 정기 회장과 함께 골인 지점 바로 그곳에서 우승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골인하는 그때 그 순간 우리 셋은 부등켜 안고 엉엉 울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 때의 감격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때 손 선생도 스타디움에서 그 순간을 지켜보셨다. 평생의 소망을 이룬 그 순간 얼마나 기쁘셨을 까. 며칠 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이 봉주 선수의 쾌거의 순간을 회상하면서 선생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핸드볼 3연승의 꿈이 깨지고 밤새 잠을 못 이뤄 부은 얼굴로 호텔 방에서 혼자 아침 7시까지 TV를 마주하고 이 봉주 선수의 역주를 지켜보았다. 장한 모습으로 2시간 내내 선두 그룹을 지키며 역주하며 2위로 골인하는 순간, 나는 만세를 외치며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 순간 천장에 떠오르던 손 선생의 눈물 어린 그 모습! 장하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지 못하고 뛰었던 60년 전의 한을 후배들이 풀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60년 전 그 때 그 선수들의 사인첩에 우리글로 뚜렷이 '손 기정'이라 써 놓으신 그 용기, 그 애국심. 영원히 살아남아 후손의 귀감이 될 것이다.
<전 대한체육회장 김 종하>
연국희기자 ykook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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