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프로야구/마니아칼럼]찬호의 화두는 ‘블로운 스타트(Blown Start)’

  • 입력 2004년 4월 23일 10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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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언 특급' 박찬호(31,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콜론은 넘을 수 없는 상대인가?

올 시즌 두 차례 선발 맞대결에서 콜론을 상대한 박찬호는 무기력증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23일(이하 한국시간) 애너하임 홈구장 에디슨 필드에서 열린 애너하임 에인절스전에 선발로 나선 박찬호는 5.1이닝 동안 6피안타 4사사구 7실점(6자책)점을 기록하며 5-7로 애너하임에 패배, 시즌 3패째를 당하고 말았다. 평균 자책(방어율)도 전날의 3.92에서 5.19로 급상승했다.

다만, 투구수 조절은 이상적. 5회 1사까지 87개를 던져 스트라이크는 51개 볼 36개의 비율로 제구력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집어넣은 실투. 1회 말 트로이 글로스에게 3점 홈런을 허용한 투구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게다가, 시애틀전에 보여주던 위력적인 95마일대 포심 패스트볼은 흔적없이 사라졌고 볼끝의 무브먼트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투심도 시애틀전만큼의 위력이 6회 강판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던 게 또 다른 문제.

이는 환경적 요인, 즉 야간 경기에 익숙했던 박찬호가 낮 경기에 대한 저하된 적응력이 구위의 반감으로 연결된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을 내릴 수도 있다. 2002시즌부터 전날까지 무려 15승 2패의 경이적인 낮 경기 승률을 기록중인 콜론을 상대한 박찬호의 심적 부담감은 1회 말 선두타자 데이빗 엑스타인의 몸에 맞는 볼로 나타났다. 박찬호는 이후 빗맞은 안타와 내야진의 뼈아픈 에러로 초반 대량 실점, 되돌릴 수 없는 패배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텍사스 울린 '텍사스 히트'

2004년형 박찬호의 피칭 엔진은 플라이볼이 아니라 그라운드볼이다. 그라운드 볼 투수로 변신한 박찬호의 승리 여부는 내야수비의 안정감과 직결된다. 하지만, 이날 텍사스의 내야진은 박찬호의 투구에 리듬감을 부여할 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게 '옥(玉)의 티'.

팀 타율 .309를 기록하며 최근 영 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텍사스 젊은 타자들의 초반 공세가 위력적이었다. 1회 초 공격에서 텍사스는 1번 마이클 영이 볼넷을 골라 출루한 뒤, 2번 행크 블레이락의 빗맞은 타구를 콜론이 붙잡아 1-5-3 병살을 노리다 2루수 애덤 케네디의 수비 실책으로 무사 1,2루의 득점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3번 알폰소 소리아노의 번트 실패로 선행주자가 3루에서 봉살당한 뒤, 4번 브래드 풀머가 중견수 얕은 플라이로 물러나 맞은 2사 상황에서 5번 데이빗 델루치가 삼진으로 물러나 무사 1,2루의 기선 제압의 기회가 무산된 게 박찬호에겐 초반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우려는 이는 1회 말 바로 나타났다. 박찬호는 올 시즌 재미를 톡톡히 보고있는 테일링 패스트볼(Tailing Fastball)의 실투로 데이빗 엑스타인에게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하며 위기를 맞아 결코 상쾌하지 않은 출발을 했다.

2번 대린 얼스태드를 2루 땅볼로 유도했지만, 소리아노의 수비 동작에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해 타자주자 얼스태드를 1루에서 살려준 게 화근. 초반 불운의 절정은 3번 제프 다바논의 빗맞은 타구가 텍사스 히트로 연결된 뒤, 트로이 글로스의 좌중간 3점포로 연결된 순간이었다.

'소리아노-블레이락' 내야가 안 도와주네

2004년형 박찬호의 피칭 엔진은 플라이볼이 아니라 그라운드볼이다. 이날 경기에서 그라운드 볼 대 플라이 볼 비율은 8:6으로 그라운드 볼 위주의 투구를 펼친 것으로 드러났다. 시애틀전과는 정반대의 투구 운영이었던 것.

그라운드 볼 투수로 변신한 박찬호의 승리 여부는 내야수비의 안정감과 직결된다. 하지만, 이날 텍사스의 내야진은 박찬호의 투구에 리듬감을 부여할 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게 패인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1회 말 더블 플레이 기회에서 소리아노의 보이지 않은 실책과 2회 말 무사 1,3루 상황에서 평범한 3루 땅볼을 놓쳐 추가 3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블레이락의 수비는 그라운드볼로 아웃 카운트를 잡아야 하는 박찬호의 어깨를 무겁게 한 것.

뒤집어 생각해보면, 마운드에서 신뢰할 만한 투구를 보여주지 못한 박찬호의 불안안 투구로 인해 팀의 내야진이 평상심을 다소 상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박찬호의 부진과 내야진의 수비실책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의한 마이너스 효과로 볼 수 있다.

소리아노와 블레이락등 내야수들의 공ㆍ수에 걸친 부진은 박찬호의 투구 리듬을 살려주지 못한 반면, 타석에서 홈런 3방으로 4점을 만회한 닉스와 데이빗 델루치, 그리고 정교한 타격을 선보인 에릭 영등 외야수들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돋보인 경기라고 할 수 있다.

랜스 닉스, '찬호 도우미' 등록

경기 전까지 타율 .462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는 랜스 닉스. 닉스는 지난 17일 박찬호의 시애틀전 시즌 첫 승 당시 2타수 2안타(1홈런 포함) 2타점의 맹타를 휘두르며 박찬호의 안정된 피칭에 밑거름이 되었다.

닉스와 박찬호의 좋은 관계는 이날 경기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0-3으로 뒤지던 2회 초 선두타자 에릭 영이 콜론의 초반 제구력 난조를 적절히 이용, 볼넷을 골라 출루한 뒤 만든 무사 1루의 기회에서 들어선 닉스는 콜론의 바깥쪽 패스트볼을 잡아당겨 우중간 펜스를 넘기는 투런 홈런을 터트려 박찬호의 어깨에 힘을 불어 넣어줬다.

LA 다저스 시절의 개리 셰필드(뉴욕 양키스)와 같은 찬호 도우미가 텍사스에서는 닉스로 굳어지는 분위기. 이날 경기는 비록 패했지만 닉스의 존재는 박찬호에게 향후 경기에도 큰 힘이 되어줄 전망.

'테일링 패스트볼(Tailing Fastball)' 구질 노출 우려

2회 말 무사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8번 숀 피긴스가 박찬호가 우전 안타를 뽑아낸 구질은 박찬호의 신무기 테일링 패스트볼. 9번 애덤 케네디가 파울을 쳐냈지만 정확하게 때려낸 타구도 마찬가지로 테일링 패스트볼이었다.

즉, 애너하임이 이미 박찬호가 좌타자를 상대할 경우, 테일링 패스트볼의 구사 빈도가 높다는 분석에 의해 집중적으로 그 구질을 노리고 타석에 임하는 듯한 모습.

게다가, 테일링 패스트볼의 '로케이션(Location)'도 상당히 중요하다. 숀 피긴스나 애덤 케네디와 같이 홈 플레이트쪽으로 바짝 붙는 경우 어설프게 좌타자 외곽으로 로케이션을 잡게되면 오히려 더 치기 좋은 구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좌타자가 홈플레이트로 바짝 붙는 경우는 내곽으로 로케이션을 형성하고 떨어지는 경우에는 외곽 로케이션을 구사하는 '운영의 묘(妙)'를 살릴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런 부분이 역으로 실행된다면, 자칫 스스로 자멸을 초래할 수도 있는 구질이 테일링 패스트볼이라는 사실. '잘쓰면 약(藥)'이지만 '못쓰면 독(毒)'이될 수 있는 동전의 양면이 바로 테일링 패스트볼의 특성이다.

데이빗 델루치의 '북치고 장구치고'

2-6으로 뒤져 승부에 암운이 드리워진 3회 초 추격의 물꼬를 틔우는 솔로포 한방으로 팀 전력 재정비의 기회를 만들어냈던 데이빗 델루치. 델루치는 4회 말 무사 1루 상황에서 9번 애덤 케네디의 우익선상으로 빠질듯한 2루타성 타구를 몸을 날리면서 잡아내는 환상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델루치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는 경기 중반 팀의 활력소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호수비. 한편, 애너하임 관중들도 적이지만 훌륭했다는 의사를 기립 박수로 표현하는 성숙된 관전태도를 보여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팀 타선은 이후 콜론 공략에 실패하며 동시에 성급한 타격을 보여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델루치의 대포는 콜론이 강판된 뒤에도 계속 작렬했다. 애너하임의 벤 웨버를 상대로 8회 초 다시 솔로포를 터트려 한 경기 2홈런으로 고군분투했지만, 승부의 추를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Chanho의 화두, '블로운 스타트(Blown Start)'

일반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적용하는 '블로운(Blown)'의 개념은 세이브 부문에서 적용되어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선발 투수에게도 '블로운'의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다.

블로운 스타트의 기준은 선발 투수가 5이닝 미만 투구를 하고 5자책점 이상을 기록하는 경우다. 이 경우 블로운 스타트가 기록되며 6이닝 3실점 미만의 투구를 의미하는 '퀄리티 스타트(Quality Start)'와 대칭되는 개념이다.

올 시즌 위의 블로운 스타트의 기준에 의거할 경우, 4경기를 치른 현재까지 블로운 스타트는 단 한 차례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이미 애너하임전 2경기 모두 블로운 스타트에 근접한 부진한 투구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날 경기처럼 경기 초반 대량 실점을 허용하게 된다면, 사실상 블로운 스타트를 기록한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 제 아무리 영 파워로 무장, 팀 타율 3할에 도전하는 텍사스라고 할지라도 초반 대량실점은 팀 타격마저 동반 침체로 몰고갈 가능성이 크게 된다.

벅 쇼월터 감독이 박찬호에게 바라는 게 뭔지를 눈치채야 한다. 쇼월터 감독이 바라는 것은 '해결사' 박찬호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마운드의 지주 박찬호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해야할 필요도 없고 현재 구위로도 역부족인 게 사실.

젊기에 상황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영 히터들의 동반 침체를 적어도 예방할 수 있는 안정감있고 신중한 투구가 필요하다. 이날처럼 경기 초반 평소보다 저하된 집중력으로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정면승부를 거는 것은 과감하기보다는 무모함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물론, 경기 초반 소리아노-블레이락의 뼈아픈 실책이 대량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낮 경기'라는 경기 외적 특성을 감안했더라면 더욱 신중한 초반 승부가 필요했다.

2004시즌 부활 퍼포먼스를 꿈꾸는 박찬호의 현재 화두는 '퀄리티 스타트(Quality Start)'의 횟수늘 증가시키는 '맥시 미니엄(Maxy-Minimum)' 방식의 마운드 운용보다는 '블로운 스타트(Blown Start)'를 최소화시키는 '미니 맥시멈(Mini-Maximum)' 전략이 박찬호에겐 더 적합할 듯 싶다.

현재 박찬호의 구위로 판단할 땐 더욱 그렇다. 맥시 미니멈 전략은 그 이후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며, 2004시즌 초반 부진을 거듭하고 있는 박찬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2년간의 긴 공백으로부터의 연착륙이 아닐지 모를 일이다.

이일동 동아닷컴 스포츠리포터 sp5dnlw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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