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80년전 축구응원가 ‘햇빛’…자료수집가 이재형씨 공개

  • 입력 2004년 5월 5일 17시 55분


국내 최초로 추정되는 축구응원가 필사본을 펼쳐 보이는 이재형씨. 이 필사본에는 ‘동에 번적 서에 번적 넓은 마당에…’라는 가사(위 왼쪽)가 1∼7의 숫자로 된 악보와 함께 적혀 있다. 위 오른쪽은 이 노래의 원곡인 ‘휘문축구응원가’. 1922년 발행된 ‘최신중등창가집’에 수록된 것으로 이번에 함께 빛을 보게 됐다. 김미옥기자
국내 최초로 추정되는 축구응원가 필사본을 펼쳐 보이는 이재형씨. 이 필사본에는 ‘동에 번적 서에 번적 넓은 마당에…’라는 가사(위 왼쪽)가 1∼7의 숫자로 된 악보와 함께 적혀 있다. 위 오른쪽은 이 노래의 원곡인 ‘휘문축구응원가’. 1922년 발행된 ‘최신중등창가집’에 수록된 것으로 이번에 함께 빛을 보게 됐다. 김미옥기자
국내 최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축구응원가 원작과 필사본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축구자료수집가 이재형씨(43)는 5일 ‘보명강습회 필기장(普明講習會 筆記帳)’이라는 문건을 공개했다. 표지에 ‘대정(大正) 12년(일제강점기 연도 표기로 1923년에 해당)’이라고 적힌 이 필사본에는 ‘축구응원가’라는 제목으로 ‘동에 번적(번쩍) 서에 번적(번쩍) 넓은 마당에, 무쇠다리 번ㅱ불(번갯불) 달녀(달려) ㅱ논다(뛰논다), 맹호 갓흔(같은) 우리 선수 대적할 주구야(대적할 자 누구냐), 후래이 후래이 후래이 후래이 용감한 보광 건아들’이라는 가사가 1∼7까지의 숫자로 된 악보와 함께 적혀 있다.

이 문건은 이씨가 최근 고문서 판매상으로부터 구입한 것. 표지에 작성자의 이름이 최순경(崔順卿)으로 적혀 있다. 사료 연구가들은 문건 안에 1910년대 유행했던 학도가, 장한몽가, 심청가, 이팔청춘가 등 창가 10여곡의 가사도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야학 지도자가 유행하던 노래들을 모아 적어 놓은 것으로 유추했다. 최씨는 야학 지도자이며 ‘보광’은 야학당의 이름일 것이라는 풀이.

이 문건을 본 노동은 중앙대 한국음악연구소장은 관련 자료를 뒤진 끝에 원작으로 추정되는 문건을 찾아냈다. 1922년 박문서관에서 발행한 ‘최신중등창가집’에 실린 ‘휘문 축구응원가’가 그것. 다른 부분은 모두 같고 마지막에 ‘보광 건아들’ 대신 ‘휘문 건아들’로 되어 있는 부분만 다르다.

이 노래는 당시 휘문고보와 보성고보 등에서 음악교사를 역임한 이상준 선생이 작곡하고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 교무책임을 맡았던 독립운동가 장응진 선생이 가사를 쓴 것이다.

노 소장은 “휘문 축구응원가가 국내 최초의 축구응원가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그는 또 “필사본의 축구응원가는 원곡의 1절을 학교 이름만 보광으로 바꾼 것”이라며 “개사한 필사본이 있다는 것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 이 노래가 널리 불렸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국 축구는 2002월드컵에서 4강에 오를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우리 고유의 축구 응원가라고 할 만한 것은 윤도현이 부른 ‘오 필승 코리아’ 정도. 나머지는 대부분 유럽의 응원가에서 따온 것이다.

1957년 휘문고를 졸업한 이헌구씨(68·서울시의회 의원)는 “재학 시절 휘문 축구응원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선배들이 부른 소중한 응원가가 발견돼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 승무원들에 의해 도입된 축구는 이후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 1911년 오성학교 보성학교 배재학당 등 5개 학교가 참가하는 한국 최초의 축구 대회가 열렸다. 이후 1929년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경성 대 평양 대항전(경평축구)이 열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축구는 민족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1942년 조선축구협회를 해산시키기도 했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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