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지난달 28일 귀국한 장 교수는 “유럽 프로리그가 끝난 직후 3주간은 선수와 감독의 이적이 가장 활발하다. 지금이 대략 그 시기인데, 이때 꾸물대다간 자칫 적임자를 다른 클럽에 빼앗길 수 있으니 현장에서 계약 조건을 제시해 영입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미리 계약서를 준비해간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경기인 출신으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체육과학연구원의 신동성 박사가 기술위원을 지낸 일이 있지만 장 교수처럼 ‘팬’에서 출발한 기술위원은 전례가 없다.
“아버지를 따라 축구장을 다니며 자연스레 축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그는 “여섯 살 때 서울운동장에서 본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뮌헨 올림픽 예선전을 잊을 수 없다”고 축구와의 인연을 되짚었다. 당시 한국이 0-1로 패해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자 ‘어린 장원재’는 엉엉 울면서 ‘분’을 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축구 선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소질이 없었다. 장 교수는 “그만큼 연습을 했으면 실력이 조금은 나아져야 하는데 초등학교 학급 대표 선수로도 뽑히지 못했다”며 웃었다. ‘소년 장원재’는 대신 심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축구를 잘 못하는 그가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90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영국 런던대에서 유학했다. 영국 생활은 유럽 축구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킬 기회였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프리미어리그’는 물론 아마추어들의 5부, 6부리그 경기까지 틈만 나면 쫓아다녔다. ‘재영(在英) 한인 축구리그’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영국에서의 축구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축구칼럼을 썼고, 그것이 성가를 얻게 되면서 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선진 축구의 흐름을 잘 알아 협회의 다양성 부족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협회가 그를 기술위원으로 선임한 이유.
그의 ‘진짜’ 전공은 비교연극사. 축구가 ‘꿈’이라면 연극은 그의 ‘인생’이다. 그가 국문과에 진학해 연극학을 전공으로 삼기로 한 것도 중고교 시절부터 정해놓은 길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축구장으로 인도했다면 어머니는 연극 극장으로 안내했다. 어머니와 함께 연극에 재미를 붙여가던 중학생 시절 ‘친구의 아버지들 가운데 극단 대표가 두 분이나 계셔서’ 수시로 극장 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고려대 국문과를 택한 것도 “비슷한 수준의 대학에서 희곡 전공을 한 교수가 고려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연호 교수가 그의 스승이다. 그는 요즘 서 교수와 함께 극작가 오태석의 전집을 편찬 중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연극 기획자로 영역을 넓혔다. 지난해 연극 ‘내사랑 DMZ’를 기획했고, 체코 극단인 ‘이미지 시어터’의 내한 공연 기획도 맡았다. 내년에는 한국 극단의 영국 공연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의 ‘연극 사랑’은 딸로 이어지고 있다. 그를 따라 연극판을 쫓아다니던 초등학교 4학년 딸 보경이가 직접 연극을 하겠다고 나선 것. 보경이는 4일 막을 올리는 ‘자전거’에 출연한다.
꿈과 인생, 축구와 연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그는 남들보다 두 배 바쁘다. 하지만 요즘, 그는 남들보다 두 배 행복하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장원재교수는
△1966년 서울 출생
△1990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1∼2000년 런던대 석박사
(비교연극사)
△2001년∼현재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
△저서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 이야기’ ‘AGAIN 2002’ ‘오태석 연극, 실험과 도전의 40년’ ‘셰익스피어와 영상문화(번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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