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특기인 왼발 돌려차기가 작렬하면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혼절을 시키고야 마는 여장부. 하지만 이런 그도 어쩔 수 없이 감수성 예민한 여자. 오죽했으면 그의 별명이 ‘태권 숙녀’였을까.
28일 아테네 팔리로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2004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여자 57kg급 결승전. 복병 니아 앱달라(미국)를 2-1로 꺾고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건 순간 장지원(25·삼성에스원)은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4년 전 시드니 올림픽 태권도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절친한 친구 정재은에게 티켓을 내준 뒤 끝 모를 좌절과 슬럼프에 빠져 헤맸던 나날들. 2000년 홍콩 아시아선수권대회와 이듬해 제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으나 2002 부산아시아경기를 앞두고는 다시 선발전에서 미끄러졌다. 지난해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을 때는 운동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마침내 재기에 성공했다. 4년 전 상처가 너무나 컸던 탓에 지난달 태백분촌에서 입에 단내가 나는 혹독한 지옥훈련을 기꺼이 감내해내지 않았던가.
결승전은 쉽게 이길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장지원의 신승. 2회전까지 왼발 돌려차기를 앞세워 4점을 앞서나갔지만 3회전 들어 지나치게 승부를 피하다 1점을 뺏겼고 경고가 4개로 누적되면서 2점을 감점당했다. 그러나 장지원은 결국 세계정상에 우뚝 섰다.
반면 신예 송명섭(20·경희대)은 남자 68kg급 준결승에서 ‘한국 킬러’ 하디 보네코할(이란)에게 10-11로 뒤진 뒤 감점이 1점 적어 주심의 판정을 기다렸지만 보네코할의 손이 올라가 분루를 삼켰다. 송명섭은 3, 4위전 진출전에서 타메르 후세인(이집트)을 9-6으로, 3, 4위 결정전에선 디우구 실바(브라질)를 12-7로 꺾고 동메달을 따냈다.
아테네=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시드니의 눈물’ 닦고 마침내 ‘태권여왕’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 한국체대 팀 동료인 정재은과의 맞대결에서 1-1로 맞선 상황. 장지원은 경기종료 10초를 남기고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코칭스태프가 갑자기 기권 타월을 던지는 바람에 졸지에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3명이 물고 물린 접전에서 먼저 1승을 챙긴 정재은 밀어주기의 희생양이 됐던 것. 정재은이 시드니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때 소리죽여 울었다는 장지원은 이후 끝 모를 슬럼프를 헤맸다.
그랬던 그가 자신감을 되찾은 것은 졸업 후 현 대표팀 사령탑인 삼성에스원의 김세혁 감독을 만나면서부터. 아테네 올림픽 세계예선에서 일약 우승을 차지한 그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대표 선발전에서도 1, 2차를 석권했다.
1m74의 큰 키를 이용한 왼발 돌려차기는 남자 선수들에게도 공포를 안겨주는 기술이다.
아테네=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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