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체전]역사

  • 입력 2004년 10월 12일 12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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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의 일환으로 개최

전국체육대회는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대회가 창설된 후의

첫 행사로 그해 11월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기원으로 한다. 초기의 조선체육대회는 지금처럼 종합대회의 성격을 띠지 못했으나 회를 거듭하면서 체육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그러다 1925년 서동 원두에 세워진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조선 신관경기대회가 종합대회의 성격을 띠고 열렸으나 이는 일본인에 의해 열린 경기어서 그 의미가 바랬다.

1934년 조선체육회 창립1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우리 민족 종합체육대회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다섯 종목의 실시와 보조경기장을 사용하였다. 이 경기가 치러진 후 매년 종목추가를 통해 경기수준이 향상되었고 나아가 많은 종목에서 일본을 앞지르게 된다. 그것은 당시 국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항일”의 의미를 일깨워주기 충분한 것이다. 1936년 전조선종합경기대회가 절정에 오르지만 2년 후 일본의 새로운 탄압정책에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당하고 대회 역시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에서 "대한"으로

1945년 광복으로 인해 그해11월 조선체육회가 재기하고 12월에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를 열어 끊어졌던 대회의 맥을 다시 잇게 된다. 그 다음해부터는 각 경기단체들이 조직 정비됨에 따라 경기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이때부터 “전국체육대회”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단체와 행사의 명칭이 “대한” 또는 “한국”으로 통일되었다. 또한 이 경기를 통해 건국이후 올림픽대회 첫 참가를 앞두고 여러 부문에서 우수한 기록들이 작성되었다.

◇마니산에서의 성화채화

전국체육대회가 틀이 잡힐 무렵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동란으로 31회 대회가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육인들의 열정과 투지를 통해 1951년에는 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광주대회를 치러내고 말았고, 이소식이 세계 스포츠 계에 알려져 뜨거운 격려가 이어졌다. 1953년 휴전이 되면서 체육대회도 대형화되어 갔고, 전국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위해 지방순회개최를 실시하였다. 또한, 1955년 36회 경기부터 故이상백 박사의 제의로 단군의 전설이 깃든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한 성화를 대회장까지 봉송되었다.

◇대회의 거대화에 따른 소년체전 분리

1966년 5년 만에 개최된 47회 서울대회는 참가규모가 37회의 두 배에 달했고, 처음으로 대회표어를 제정하였다. 대회 표어는 그 후 매년 새로 제정되어오다 51회의 표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1967년에는 카드섹션이, 1968년에는 입장상제도가 실시되었으나, 각 개최지에서 입장상을 연달아 수상하는 문제가 이어져 61회 대회부터는 입장상을 폐지하게 되었다. 다만,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굳어 보이는 행동보법이 문제가 되어 64회 대회부터 자연스런 보법으로 정착되어갔다. 한편, 대회 50회를 기념하여 성화전국일주, 카드섹션의 동화 등장, 이북 5도 임원단의 입장식참가 등의 새로운 의견들이 나왔다. 52회 대회에서는 27개 종목, 16,000명에 달하는 참가인원으로 인해 대회운영에 문제점이 생기자 53회부터는 초등부와 중학부를 분리하여 전국소년체육대회를 별도로 개최하게 되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주춧돌

소년체전 분리 후 지방대회가 활성화되었으며, 체육인구의 저변확대와 대중화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는 후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유치로 한국체육의 국제적 의상을 제고하는 주춧돌을 마련하게 된다. 이 두 대회에서 경기력의 놀라운 향상을 보여주며 체육선진국에 돌입하는 등의 결과를 낳게 한 것이 바로 전국체육대회인 것이다. 1989년으로 고희를 맞은 전국체육대회는 세계 각국의 교포들에게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자축하는 의미에서 세계한민족체육대회를 창설 전국체육대회와 병행 개최하였다.

90년대는 2만 명 이상이 대회에 참가하기에 이르렀고 74회 광주대회에서는 역대 최대인원을 넘어서면서 문제화되었고, 이에 따라 75회부터는 구기종목을 중심으로 사전 예선제를 실시하였다. 77회에는 마스코트가 78회에는 야간개회식을 선보이게 되어 점차 마스코트사용이 정착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79회에는 서울올림픽개최 10주년을 맞이하여 제주도에서 처음 개최 되어 전국을 일순하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80회는 인천공항의 건설에 발맞춰 인천에서 치러졌으며, 20세기 마지막 대회인 81회는 부산에서 2002부산아시안게임의 리허설성격을 띄고 치러졌다. 기존시설의 활용으로 비용을 대폭 줄인 84회 대회는 전북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제85회 전국체육대회는 충청북도에서 열리며 전 종목을 개최 시도에서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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