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번 열린 말문은 1시간이 넘도록 닫힐 줄 몰랐다. 30년 넘는 야구감독 인생. 할 말은 많고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감독에서 최고경영자로 변신한 삼성 라이온즈 김응룡 신임사장(63). 10일 경북 경산시 삼성볼파크에서 만난 그는 어눌하지만 솔직 담백하게 지난 세월을 끄집어냈다.
○나는야 복장(福將)
1972년 한일은행 감독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32년 동안 지휘봉을 잡았다. 장수의 비결이 궁금했다. “내가 인덕이 있어요. 은행장, 사장, 구단주 등 좋은 분들만 만났어. 선수 덕을 봐야 우승도 하는 거야.” 1981년 한일은행 감독 시절 38만원이던 월급은 83년 해태 감독에 부임하면서 연봉 2400만원으로 껑충 뛰었고 올 시즌 삼성 감독으로 2억원의 연봉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다 행운이라는 것.
○만능스포츠맨
김 사장은 처음엔 축구를 했다. “부산 개성중 1학년 때 축구장에서 날렸어. 학급 대항 야구대회 선수로 뽑혀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거지.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열심히 했어.” 1960년대 서울 명동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덩치가 컸다는 김 사장은 72년 야구선수 은퇴 후 20년 가까이 테니스를 쳤다. 금융단 테니스대회 대표로 나갈 만큼 수준급 실력. 10년 전부터 무릎이 신통치 않아 산을 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골프. “야구단 사장 되면 골프를 잘 쳐야 한다던데…. 한 1년만 열심히 하면 문제없어.” 현재 스코어는 90대 중반.
○소중한 가족
평남 평원에서 태어난 김 사장은 열 살 때 1·4후퇴를 맞아 아버지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사흘만 피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집을 떠났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어머니, 누이, 형, 여동생 3명과 생이별을 했다는 대목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신청했는데 안됐고 사기도 많이 당했지….”
○골치 아픈 일
김 사장은 다음 달부터는 구단 사무실로 출퇴근한다. 시간 맞춰 회사에 가는 건 80년대 초반 한일은행 시절 이후 20여년 만에 처음. “넥타이만 매면 속이 메슥거려. 꼭 매야 하나.” 그는 연설과 노래도 싫어한다. “주례 요청이 많이 들어오는데 워낙 말하기가 싫어…. 게다가 내가 음치야. 술 마시다가 나한테 노래시키면 한 대 얻어맞지.” 그런데도 프로필 애창곡란에는 ‘목포의 눈물’이라고 쓴다. “해태 시절 관중석에서 그 노래가 하도 많이 나와 듣다 보니….”
○새로운 인생
야구감독을 안하면 마음이 좀 편할 줄 알았다. “발 뻗고 푹 자려고 했는데 잠이 더 안 오더라고. 앞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 삼성 라이온즈를 뛰어넘어 야구 발전을 위해 일하겠다는 게 그의 포부. 나이 어린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코칭스태프 조각, 선수 보강 등은 선동렬 감독에게 100% 다 맡길 거야. 난 좀 더 큰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인터뷰하는 동안 김 사장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고 축전도 날아 왔다. 야구인들의 축하 메시지가 대부분. 올 시즌 프로야구 최우수선수인 삼성 투수 배영수는 “저도 은퇴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새 꿈을 만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사장 김응룡’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야구계 전체의 경사였다.
경산=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 김응룡 말말말…
▽어∼. 동렬이도 없고. 어∼. 종범이도 없고(1998년 선동렬에 이어 이종범마저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 해태의 주축 선수들이 다 빠져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다며) ▽동쪽으로 갈 거야(1999년 말 앞으로의 거취 문제에 선문답식으로 얘기하며. 실제로 1년 뒤인 2000년 11월 삼성과 계약했으니 서쪽인 광주에서 동쪽인 대구로 간 셈) ▽두렵다(9일 삼성 사장 승격이 발표된 뒤 여태껏 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돼 긴장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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