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프리즘]전설의 루팔벽, 그 황홀한 포옹

1953년 7월 2일 오전 2시 20분. 세계적 등반가 헤르만 불(당시 29세·오스트리아)은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5m)의 마지막 캠프(6918m)를 박차고 나갔다. 날씨는 맑았다. 그는 7500m 지점에서 거추장스러운 산소통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7월 3일 오후 7시 그는 마침내 정상에 섰다. 인류 역사상 첫 8000m급 봉우리 41시간 무산소 단독 등정. 그때까지 31명의 등반가들이 이곳을 오르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살인적인 추위가 몰아치는 산꼭대기에서 꼿꼿이 선 채 하룻밤을 보내고 산을 내려왔다. 당시 학자들은 ‘인간이 산소통 없이 8000m 이상 고지를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 6월 27일 오전 3시. ‘세기의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당시 26세·이탈리아)는 낭가파르바트 루팔 벽 루트 마지막 텐트(7350m)를 출발해 14시간 만인 27일 오후 5시에 꼭대기에 닿았다. 떠날 땐 혼자였지만 정상에 섰을 때는 그의 한 살 아래 동생 귄터 메스너(25)와 함께였다. 동생 귄터는 형이 캠프를 빠져 나가자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던 것. 하지만 그들에겐 생명줄인 로프도, 단 한 줌의 먹을 것도 없었다. 그날 밤 그들은 정상 바로 밑에서 덜덜 떨며 얇은 담요 한 장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 날 메스너 형제는 로프없이 내려가기 쉽다고 생각되는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루트도 어렵긴 마찬가지. 몸은 추위와 허기로 지칠 대로 지쳤다. 비몽사몽 앞서가던 형 라인홀트가 동생이 뒤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그는 울부짖었지만 동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라인홀트도 동상으로 썩은 엄지발가락 하나와 나머지 발가락 일부를 잘라 내야 했다.

2005년 7월 14일 오전 2시. 이성원(44) 대장이 이끄는 ‘한국 루팔 벽 원정대’의 김창호(37) 이현조(33) 대원은 캠프4(7600m)를 출발한 지 25시간 만인 15일 오전 3시에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메스너 형제가 루팔 벽 루트로 오른 뒤 35년 만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동안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12개의 등반 팀이 실패했고 국내 팀도 두 차례나 쓴 맛을 봤다.

낭가파르바트 남쪽의 루팔 벽은 표고차 4500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암벽. 68도에 이르는 경사 때문에 머리 부분엔 눈이 쌓이지 않는다. 낭가파르바트는 현지인들의 말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다. 서쪽의 디아미르 벽도 3500m나 된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삼각형을 그리는 것과 같다.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삼각형의 밑변을 그리는 일이다. 꼭대기를 향해 오르는 일은 위로 솟은 두 변 중 한 변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정상 도달은 하나의 중간 단계일 뿐이다. 삼각형은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탈리아 티롤지방의 중세 고성(古城)에 산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열쇠를 집안에 놓고 나온 탓으로 성문을 열 수 없었다. 그는 “성벽쯤이야” 하며 성벽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뿔싸,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발목에 금이 갔다.

삼각형은 누구나 쉽게 그릴 수 있다. 하지만 3개의 변을 다 그리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완성했다고 할 수 없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