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할아버지가 달렸던 그 길을 그대로 달려 보니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36·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가 지난달 20일 가슴에 태극 마크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70년 전 손기정(1912∼2002) 선생의 한이 서린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트랙을 달렸다. 황영조는 손 선생 생전에 “할아버지”라며 손자처럼 따랐던 마라톤 후배. 황영조는 감격에 겨운 듯 트랙을 천천히 한 바퀴 돌더니 당시 결승선이 표시된 곳에 이르러 잠시 발을 멈췄다. 그리고 준비한 손 선생의 결승선 골인 사진을 꺼내 들었다.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했을까요? 시상대 위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저려옵니다.”
56년 세월의 1936년 베를린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은 여러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 우승자가 나란히 한국인일뿐더러 대회 날짜도 똑같은 8월 9일. 더욱이 시간으로 보면 손 선생이 시상대에서 월계관을 쓴 8월 9일 오후 6시에 마치 배턴터치를 하듯 황영조가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했다. 참가 선수도 베를린이 56명(27개국)이고 바르셀로나는 딱 2배인 112명(73개국). 날씨가 마라톤 하기엔(적정온도 섭씨 9도) 좀 더운 것도 닮았다. 베를린은 섭씨 21∼22.3도, 바르셀로나는 섭씨 28도에 습도 80%의 후텁지근한 날씨.
황영조는 “바르셀로나에선 29km 지점부터 (김)완기 형과 나, 그리고 일본의 모리시타 등 3명이 선두를 달렸는데 베를린에선 29km 지점에서 할아버지와 영국의 하퍼가 선두로 가던 자바라(아르헨티나·31km 지점에서 기권)를 따라잡았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트랙을 1.25바퀴(500m) 돌고 56명 중 22번째로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아르헨티나의 자바라(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우승자)가 2위와 150m 거리를 두고 선두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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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거의 편평하다. 더구나 13∼30km 지점은 직선인 고속도로. 아푸스고속도로 중간에 있는 반환점을 돌아오는 코스다. 1∼13km와 30∼42.195km 구간은 10만 평 규모의 그뤼네발트(‘녹색 숲’이라는 뜻) 공원을 달리는 숲 속 길. 하벨 강변을 따라 나 있는 코스 주변엔 지금도 200∼300년이나 된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하다. 다람쥐 고라니 멧돼지 토끼 여우 등이 뛰어다닌다.
황영조는 “40km 지점의 철교 아래 S자 오르막이 좀 걸리지만 2위 하퍼를 87초(약 400여m) 거리로 떨어뜨린 상황에선 큰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10km 지점 5위(34분 10초), 25km 지점 3위(1시간 24분 49초)로 가다가 마침내 28km 지점에서(1시간 35분 29초) 선두 자바라를 32초차로 따라붙었다. 거리로는 약 150m. 손 선생은 내친김에 29km 지점에서 자바라를 제쳤고 31km 지점에선 끈질기게 따라붙던 영국의 하퍼를 16초차(75m)로 제치고 단독 선두에 나섰다.
황영조는 “난 바르셀로나에서 29km 지점부터 일본의 모리시타를 떨어뜨리려고 10여 번쯤 스퍼트를 했는데 그때마다 이 친구가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정말 혼났다”고 말했다. “결국 40km 몬주익 언덕에서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스퍼트를 했는데 그때 모리시타가 또 따라붙었다면 아마 내가 먼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손 선생은 마지막 100m를 15초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이는 손 선생의 100m 평균 21.23초(우승기록 2시간 29분 19초)보다 6.23초 빠르게 달린 것. 생전 손 선생은 “10만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누가 꼭 등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고. 당시엔 뒤를 돌아보면 실격은 아니지만 정당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받기 때문에 달리면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거든”이라고 말했다. 당시 손 선생이 신고 뛰었던 신발은 엄지발가락과 4개의 발가락 사이가 갈라진 형태. 일본이 나름대로 고안한 특수 신발이었지만 손 선생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골인하자마자 신발부터 벗었지만 발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타디움 시상대 위에서 태극기 밑에 일장기(2위 모리시타)와 독일 국기(3위 슈테판 프라이강)가 오르는 것을 보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우리 민족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일제와 히틀러의 독일이 이런 식으로 업보를 받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황영조는 시상식이 끝난 후 스탠드에 있는 손기정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손 선생은 황영조의 손을 부여잡고 “더는 여한이 없구먼. 이제는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황영조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나와 손잡고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트랙을 꼭 달려보자고 했는데 내가 게을러 너무 늦게 왔다”며 “오늘 코스를 도는 내내 ‘나라 없는 백성은 개와 같다’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아시아인이 우승한 것은 손기정 황영조 단 두 사람뿐.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새겨진 우승자 명단엔 손 선생의 국적이 여전히 일본으로 표시돼 있다. 오죽했으면 1970년 8월 16일 새벽,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 박영록 씨가 스타디움에 몰래 들어가 끌과 정으로 5시간 동안 작업 끝에 ‘JAPAN’을 ‘KOREA’라고 바꿨을까.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총리 빌리 브란트가 이끌던 서독정부는 “국적 변경은 불가능하다”며 다시 ‘JAPAN’으로 환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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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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