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집 이사 가요!” 원정대 짐 무게만 무려 4t
“이러다가 에베레스트 횡단은커녕 산봉우리를 보기도 전에 우리 모두 질식하는 건 아닐까?”
히말라야로 통하는 ‘관문’ 카트만두에서 원정대원들이 네팔 특유의 분홍색 두꺼운 종이 냅킨으로 콧구멍을 쑤시며 내뱉는 푸념이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4개월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데다 비포장도로가 많아 사방이 먼지다. 게다가 2륜차, 3륜차(템포), 4륜차…. 세상에서 매연을 내뿜는 탈것은 모두 모아 놓은 것 같다. 일부 원정대원은 방진 마스크까지 썼다.
네팔에는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고봉 14개 중 8개가 있고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가 카트만두이니 두 달 이상 지낼 식량을 확보하려면 매연 속을 뚫고 들어와 있을 수밖에 없다.
17명의 원정대원과 원정기간에 베이스캠프를 방문할 응원단, 그리고 ‘등반의 동료’ 셰르파 등 30여 명이 사용하기 위해 중국(티베트) 쪽 베이스캠프로 가져가는 짐의 무게는 무려 4t.
카트만두에서 주로 구입하는 것은 고소에서 쓸 산소(통)와 한국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장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식량이다. 주식인 쌀은 물론이고 감자 계란 채소 등 웬만한 먹을거리는 원정대원들이 뛰어다니며 끌어다 모은다. 김치도 여기서 담근다.
주요 장비와 고추장 등은 서울에서 항공화물로 부쳐 이미 티베트로 날아갔다. 이게 1.3t. 비싼 항공화물로 부치기엔 너무 부담스러워 직접 들고 온 장비와 식량 등 트럭으로 옮길 나머지 짐이 2.7t이나 된다.
본격적인 원정이 시작되지 않아 포터가 없기 때문에 이 모든 짐을 분류하고 포장하고 옮기는 일은 모두 원정대원들의 몫. 그래서 대원들은 하루 서너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 행정업무를 맡아 좀처럼 숙소를 떠날 일이 없는 여성대원 김영미(26·강릉대 OB)는 “형(여성 산악부원은 남자 선배를 이렇게 부른다) 우리 네팔에 온 거 맞아?”란다.
○“산소통이 이상해요”
박영석 대장이 선발대에 합류한 다음 날인 지난달 29일 아침이었다. “야, 전부 집합!” 대장의 목소리가 높고 다급하다. 경계경보가 아니라 실제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다. 모두 소리 나는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니 박 대장이 산소통을 껴안고 있다. 고산등반에서 산소통의 의미는 남다르다. 산소가 희박한 고산에서 산소통은 생명줄이다. 박 대장의 호통은 3L씩 들어있어야 할 산소가 통마다 들쭉날쭉하다는 것. 대원들은 그날 밤 30개의 산소통을 일일이 게이지로 확인하느라 밤을 새웠다. 게이지도 고장 난 게 있는 것으로 판명돼 대원들이 한 번 더 ‘깨지고’ 똑같은 일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했다.
○“잠이 통 오질 않네”
기자는 남극과 북극, 히말라야 안나푸르나(해발 8091m) 등 박 대장과 수없이 동침(?)해 봤지만 요즘처럼 그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드르렁 코를 고는 탓에 어떻게 하면 먼저 잠에 빠질까 고민을 했을 정도. 요즘에는 “미치겠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라며 잠꼬대까지 한다. 최초로 산악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강철 인간’ 박영석을 이처럼 당황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낮에 슬쩍 물어봤다.
“반군은 총파업한다고 난리지, 파뿌리 하나부터 중국관리 입국 협의까지 모든 걸 다 챙겨야 되니 죽겠다, 죽겠어.”
하지만 곧이어 “그래도 재미있지 않아?”라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다. 참 낙천적이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은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는 “1%도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내가 미쳤어, 그럼 절대 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박영석은 네팔에서도 유명인이다. 지난달 31일 네팔 기자들의 요청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박 대장은 원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등반 도중 유명을 달리한 셰르파의 자녀를 돕는 일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고 유력지 ‘더 라이징 네팔(The Rising Nepal)’ 등 현지 신문은 이번 에베레스트 횡단 원정대를 대서특필했다.
○이제 절반은 성공이다
선발대가 네팔의 국경 도시인 코다리로 출발하는 D데이는 2일이었다. 전날 밤 10시 넘어 마치 개미 행렬처럼 짐보따리를 둘러메고 트럭에 싣기 위해 움직이는데 난데없이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을 가득 태운 트럭 한 대가 서더니 원정대에 다가왔다.
누구든 총을 든 사람을 보면 겁나지 않나? 그것도 낯선 타국에서…. 한밤중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니까 혹시 반군이 아닌지 의심한 듯하다. 낮에는 뿌연 먼지에도 불구하고 붉은 깃발을 든 수백 명의 청년들이 도심에서 뛰어다니고, 밤에는 까마귀 떼의 소음에 뒤척이는 카트만두. 2일 오전 3시간밖에 못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 히말라야로 향하는 선발대원 7명의 얼굴은 마치 복역을 마치고 출소를 준비하는 사람들 같았다. “해방이다, 히말라야야 내가 왔다.” 남아 있는 우리들은 당연히 형량이 많이 남은 죄수들이었다.
전창 기자 jeon@donga.com
에베레스트 횡단 대장정… 해발 8000m ‘비박’
“박영석이 또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른다며? 횡단이라고 하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래.”
“그럼 별론 걸, 은메달이네.”
과연 그럴까?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인도 국적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1953년 5월 29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50m)에 오른 뒤 지금까지 정상에 선 산악인은 2000명에 이른다. 이 중 횡단 성공기록은 1988년 일본 중국 네팔 합동대가 유일하다.
당시 어떻게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랐다가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18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일본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에베레스트를 국경선으로 마주한 네팔과 중국에 사상 첫 횡단이라는 엄청난 모험을 제안한다.
순수 원정대원만 250명에 이르는 합동 원정대를 구성한 이들은 남쪽과 북쪽에서 루트를 개척해 나가 5월 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만나는 데 성공한다. 각각 6명씩 12명이 정상에 섰고 이들 중 3명씩은 반대편에서 올라온 대원들을 인솔해 자신들이 올라온 루트로 내려갔다.
일본은 이를 TV로 생중계했다. 횡단은 맞지만 다른 대원들이 구축해 놓은 ‘안전 루트’를 통해 내려갔다.
이번에 박영석이 시도하는 횡단은 북쪽에서 정상에 오른 뒤 루트 개척이 전혀 되지 않아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남쪽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해발 8000m에서 비박(텐트없이 밤을 지새우는 것)하는 게 불가피해 동상의 위험도 매우 높다.
이번에 성공하면 단일팀으로서 세계 최초가 된다. 넓은 의미의 횡단기록으로는 두 번째가 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해낸다는 점에선 ‘진정한’ 세계 최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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