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찰나에 오듯 깨달음도 찰나에 온다

  • 입력 2006년 11월 18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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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사업가 김순중 씨
60대 사업가 김순중 씨
《나이 마흔… 쉰… 예순…

여기 육신의 세월과 ‘상식’의 장막을 걷고 사각의 링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그들을 링으로 이끄는가

현실이 아무리 고단해도 결코 패하지 않겠다는 그들

‘내 안의 나’에게 펀치를 날리는 그들을 만나봤다》

링 사이드에 앉아 본 사람은 안다. 링 위에서 치고받는 난타전 속에 튀겨진 피가 구경하는 사람들의 옷에까지 날아올 때, 링 위의 혈전을 차마 견딜 수 없어 울면서 경기를 보는 가족들의 모습을 볼 때, 링 위에 오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60대의 노인이 혈전을 준비하는 것은 분명 드문 일이다. 재일교포 출신인 올해 62세의 김순중(태풍개발 대표이사) 씨는 이 같은 격투에 나서기로 했으나 무산됐다. ‘장례식 준비를 하겠다’는 친구들의 우려 섞인 농담을 뿌리치고 1년여 동안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한남체육관에서 복싱을 해 온 그는 최근 자신과 맞싸울 60대 노인을 찾았다. 상대도 한 번 겨루어 보기를 강력히 원했다. 그러나 상대 측 노인의 건강을 체크한 의사의 만류로 경기 직전 무산됐다.

그러나 김 씨는 “내년에도 이 정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번 경기에 나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배운 것을 최대한 펼쳐 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도봉권투체육관에서는 50대 스님이 복싱을 하고 있다. 승복을 입고 글러브를 끼어 보인 해병대 출신의 지용 스님은 원투 스트레이트를 가지고도 도(道)를 이야기한다.

“선빵(선제공격)이 잘 들어가야 후빵(두 번째 펀치)도 잘 들어간다. 첫 단추가 중요하단 말이지. 모든 일에서는 일의 선후, 인과관계가 중요하단 말이야.” 주먹이 오가는 찰나에 대해서도 말씀한다. “모든 것은 찰나의 연속이야. 잘하다가도 한순간 방심하다 큰 펀치를 맞을 수 있어. 참선 수행에 있어서도 깨달음은 찰나에 온다고들 하지. 그 순간까지의 집중력이 아주 중요해. 졸면 안 되지.”

두 사람 모두 복싱을 통해 체력과 건강을 회복한 뒤 자신감을 가졌다. 배가 나와서 보기 싫다는 생각에 살빼기 좋다는 복싱을 시작한 김 씨는 1년 4개월 만에 81.5kg에서 75kg까지 줄였다.

헬스클럽에도 다녀봤다는 지용 스님은 단순한 운동이 지루해 권투도장을 찾았다고. 그는 “스트레스 해소에 이보다 좋은 건 없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어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스님께서도 스트레스를 받느냐”고 물었더니 “스님이기 전에 사람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스님은 “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도 참선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싱은 주먹을 사용해 상대를 가격하는 운동이다. 폭력성은 복싱의 기본 속성이다. 이러한 폭력성이 어떻게 자기 수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최근 중장년층 복싱대회에 참가한 소설가 양승석(필명 양부원·42) 씨는 묻고 답한다. “주먹은 인생과 마음의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하는 힘의 상징이다. 이 주먹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 주먹은 내안의 게으름과 부조리를 향한다.”

서울 구로구 구로2동 미래체육관에서 2년째 운동하고 있는 그는 “승부에서 이기고 싶은 수컷의 본능”과 “부조리한 것들을 때려눕히며 내 안의 분노를 해소하려는 욕구”도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복싱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격을 수양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힘든 운동을 통해 육체의 한계를 느낄 때 겸손함을 배운다고 했다. 상대의 펀치를 얻어맞을 때 나보다 강한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고. 이 같은 자기 성찰과 상대에 대한 인정이 있을 때 비로소 세상과의 밝은 소통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했다.

지난달 서울 도봉정보산업고등학교에서 40, 50대 층을 대상으로 열린 ‘시니어 복싱대회’에는 45개 체육관에서 74명이 출전했다. 대학교수, 경찰관, 자영업자,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참가했다. 대회에서 우승한 박장순(40·자영업) 씨는 “남자로서 힘든 걸 이겨 보고 싶어 참가했다”고 말했다. “살면서 이보다 힘든 일도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복싱을 이겨 냈다”고 말했다. 나이로는 늦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링에 오르려는 중장년의 파이터들. 그들에겐 육체의 젊음을 확인하고픈 욕구와 상대와 싸워 이기려는 승부욕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을 먼저 이기든, 자신을 이기고 남을 이기든 그들은 극복하려는 대상을 갖고 있다.

도봉권투체육관 현관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흘러간 스포츠라 비웃지 마오….”

장년층 복서들은 말한다. “흘러간 청춘이라 비웃지 마오.” 그들의 펀치는 세월과 체념을 겨누고 있다.

글=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사진=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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