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달려야 사는 사람들

  • 입력 2007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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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간 622㎞ 국토종단 울트라마라톤

달리기엔 묘한 마력이 있다. 한 번 중독(?)되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한다.

‘몸에 이로운 둥근 바이러스’라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다.

요즘엔 밥 먹듯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사람도 흔하다. 1년에 30∼40회 풀코스 완주는

보통. 매주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마라톤대회를 ‘사냥’하러 다닌다.

어디 그뿐인가. 아예 한발 더 나가 울트라마라톤에 빠져 든다.

울트라마라톤은 42.195km 이상의 거리를 달리는 것. 보통 100km나 100마일(160km)

대회부터 ‘울트라’란 말이 붙는다. 제주일주 200km 및 한라산 종주 148km 대회,

서해 강화도∼동해 강릉 308km 대회, 부산 태종대∼경기 임진각 537km 대회,

전남 해남 땅끝∼강원 고성 622km 대회 등 국내에만 30여 개나 있다.

국내 울트라대회 그랜드슬램은 경기 강화∼강원 강릉, 부산 태종대∼경기 임진각, 전남 해남∼강원 고성 등 3개 대회 완주를 이른다. 한마디로 3개 대회 결승선을 모두 끊은 사람은 울트라계의 ‘지존’이라 할 수 있다.

울트라대회는 ‘졸음과의 전쟁’이다. 땡볕, 장대비 등 ‘날씨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몸이 뜻대로 안 따라 주는 것은 참가자 모두가 마찬가지다. 3개 대회 중 가장 힘든 것은 ‘해남 땅끝∼강원 고성의 622km 코스. 150시간 이내에 골인해야 하며 하루(24시간)에 최소 100km 이상 달리지 못하면 탈락이다. 잠, 식사, 용변 등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 대회 조직위는 50km 지점마다 생수 500mL를 제공하는 게 전부다. 밤엔 머리에 헤드라이트, 몸 앞뒤에 점멸등을 달고 달린다. 자동차들의 질주가 무섭기 때문이다.

올 622km 대회(14∼21일)에는 144명이 참가해 83명이 완주했다. 맨 먼저 결승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117시간 40분을 기록한 박석희(41·공무원·대전) 씨. 박 씨는 535km 지점에서 데자뷔 현상(기억착오현상·처음 간 곳인데도 마치 옛날에 가본 것처럼 느껴지는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턱없이 모자란 잠 때문에 일어난 현상. 그래도 박 씨는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기록에 여유가 있어서 토막 잠이라도 조금씩 잘 수 있었던 것.

여성 최초로 622km 국토종단 마라톤에 성공한 가정주부 최란(47·충북 제천) 씨는 145시간 43분으로 제한시간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6일 동안 시간에 쫓겨 거의 한잠도 못자고 달렸다. 결국 400km를 지나서 데자뷔 현상이 오더니, 대관령을 넘어서자마자 30분 동안 길가에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김대수(48)-곽점순(46) 씨 커플은 622km 종단대회 이래 처음 완주한(148시간 13분) 부부. 6박 7일 동안 내내 나란히 달렸다. 힘들 땐 서로 붙잡고 울기도 여러 번 했다. 200km 지점에 못 미쳐서 김 씨의 왼쪽 발목이 퉁퉁 부었다. 찬 냇물에 발을 담가 통증을 가라앉힌 뒤 절뚝거리며 달렸다. 500km 지점에선 곽 씨가 발 통증으로 흔들렸다. 게다가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경북 구미에 사는 김 씨의 직업은 운전사. 곽 씨도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이번 대회 참가 직전에 그만뒀다. 휴가를 내기가 불가능해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 1년 동안 애써 준비한 대회를 포기할 순 없었다. “지금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다. 몸 움직임이 로봇 같다. 우리는 살아온 게 비슷하다. 어려울 때마다 둘이 산에 자주 다닌다. 맘대로 잘 안 되는 게 세상살이다. 하지만 운동이나 건강은 의지대로 할 수 있다. 같이 달리면 서로 많은 의지가 된다. 내년 여름 537km 대회만 완주하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 없다.”

주복노(60) 씨는 완주자(143시간 3분) 가운데 최고령. 2004년 부산시청에서 정년퇴임하고 마라톤에 발을 디딘 게 계기가 됐다. 풀코스 5회 완주에 개인 최고기록 3시간 21분. 2005년부터 울트라마라톤에 빠졌다. 지난해 7월 태종대∼임진각, 9월에 강화도∼강릉 구간을 완주한 뒤 이번에도 종단에 성공해 ‘60대 울트라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네 살 된 어린 외손녀를 키우고 있다. 지난해 무남독녀 딸(33)을 췌장암으로 잃은 것. 가슴에 ‘한 끼의 식사기금’이라는 국제구호단체의 이름을 적고 달렸다. 밥을 제대로 못 먹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달리면서 기금(후원 계좌: 국민은행 951701-01-121234)을 모은다. “가슴에 외동딸을 묻은 뒤 슬픔을 잊기 위해 달린다. 밥 굶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달린다. 여태 단 한 번도 기권한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 뒷산에서 하루 30km씩 연습한다.”

인간은 왜 달리는가. 왜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리는가. 원시 사냥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엔 '원시 사냥의 흔적’이 곳곳에 녹아 있다. 먹잇감을 쫓다 보면(달리기) 개울을 훌쩍 뛰어넘어야 하고(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강을 건너(수영, 카누, 카약), 돌(포환, 해머, 원반)을 던지거나 창 혹은 화살(양궁, 사격)을 날려야 한다.

장거리달리기엔 먹잇감을 뒤쫓는 원시인들의 ‘고단한 삶’이 스며 있다. ‘발바닥 간질거림’의 스릴도 있다. 일과 놀이가 하나 되는 묘한 일체감까지 숨어 있다.

현대인들은 시멘트 벽에 갇혀 있다. 사냥터는 보이지 않는다. ‘일 따로, 놀이 따로’ 직장은 더는 사냥터가 아니다. 숨이 막힌다. 그럴 때 무작정 달린다.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다리 근육이 팽팽해진다. “아, 내가 살아 있구나.”

▼울트라맨들 “훈련은 산에서”▼

울트라마라토너들은 대부분 산에서 훈련을 한다. 역대 최고기록으로 우승한 박석희 씨는 암벽 타는 클라이머. 알프스도 갔다 오고, 지난해엔 히말라야 6000m급 봉우리에도 올랐다. 올가을에 히말라야 6800m급 봉우리에 오를 계획이지만 경비 때문에 걱정이다.

그는 주로 북한산 인수봉에서 근육을 키운다. 평상시 직장에선 하루 5번 17층 계단을 오르내린다. 올 4월에 서울 인근에서 열린 222km대회와 유성 100km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그는 “산에 가려고 울트라를 시작했는데, 이제 거꾸로 울트라를 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것 같다. 울트라의 최고 매력은 달리면서 혼자만이 즐길 수 있는 주변의 풍광이다. 너무 기록에 매달리면 다치기 쉽다”며 웃는다. 최초의 여성 622km 종단 완주자 최란 씨도 충북 제천의 용두산을 매일 오르내린다. 마라톤 풀코스 30여 회 완주에 3시간 35분대 기록. 울트라 경력 6년의 베테랑이다.

대회가 가까워지면 가파른 깔딱 고개를 즐겨 오른다. 즐기면서 달린다. 길가 나무들이 친구 같다. 한번 뛰고 나면 가슴에 막힌 것들이 뻥 뚫리는 기분. 달릴 때마다 속이 메슥거렸는데 이번엔 남편이 해 준 산삼을 먹었더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년 부산 태종대∼경기 임진각만 완주하면 여성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이룬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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