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의&joy]마라톤 결승선의 ‘트랙게임’

  • 입력 2007년 10월 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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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km 승부… 막판역전의 쾌감

《10월은 마라톤의 계절. 크고 작은 마라톤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7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을 출발하는 제5회 하이서울 마라톤과 경기 파주 임진각 일대에서 열리는 문화일보 통일마라톤, 14일 충남 공주 금강변을 따라 달리는 백제마라톤, 21일 천년고도에서 펼쳐지는 경주국제마라톤, 28일 조선일보춘천마라톤 등이 잇따라 열린다. 요즘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의 화두는 ‘즐겁고 신나게 달리기.’ 트랙게임도 그중 하나다.》

육상의 꽃은 마라톤이다. 그렇다면 마라톤의 꽃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트랙게임’이다. 트랙게임이란 마지막 결승선을 앞두고 트랙이 있는 경기장 안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승부’를 말한다. 2명이 거의 동시에 경기장 트랙에 들어온다면? 아니 3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 다툼을 하며 들어선다면? 아마 경기장의 수많은 관중들은 그만 숨이 꼴깍! 넘어갈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고,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쳐 댈 것이다. 남은 거리는 길어야 300∼400m. 시간으로는 길어야 50여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트랙게임을 벌이는 선수들은 피가 마른다. 입술이 바싹바싹 타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 선수로선 이겨야 한다. 앞선 선수는 그대로 결승선에 골인해야 한다. 쫓아가는 선수는 젖 먹던 힘을 다해서라도 앞선 선수를 제쳐야 한다. 하지만 100리가 넘는 먼 길을 달려온 선수에게 한두 걸음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이봉주 두 번의 트랙게임 징크스

‘봉달이’ 이봉주(37·삼성전자)는 이런 트랙게임에서 두 번이나 지고 말았다. 한번은 1996년 경주 동아국제마라톤에서 마틴 피스(스페인)에게 1초 늦은 2위(2시간 8분 26초)로 들어온 것이다. 거리로는 5∼6m 차. 두고두고 땅을 칠 일이다.

이봉주의 트랙게임 징크스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곧 이어 열린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또 3초 차로 2위(2시간 12분 39초)에 머문 것이다. 1위는 남아공의 조슈아 투과니. 거리로는 15∼18m 정도. 올림픽 남자마라톤 사상 가장 짧은 시간차다.

“경기장에 들어서기까지 50여 m 떨어졌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조금씩 좁혀가고 있었다. 투과니와 한 15m 정도 떨어져서 잘 하면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결승선이 보였다. 결승선이 조금만 더 뒤에 있었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너무 원통하고 억울했다.”

이봉주가 트랙경기에서 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긴 적도 두 번이나 된다. 한번은 1995년 3월 경주에서 열린 동아국제마라톤. 당시 이봉주는 스물다섯의 한창때였다. 8개국에서 95명이 참가했지만 30km를 지나자 이봉주-네루카(영국)-에스피노자(멕시코, 94년 세계랭킹 2위)-마티아스(포르투갈) 4명으로 좁혀졌다. 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이제나 저제나 마지막 스퍼트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38km 지점에서 이봉주가 맨 먼저 뛰쳐나갔다. 하지만 나머지 3명의 선수도 안간힘을 다하며 바로 뒤따라 붙었다. 경주시 북군동에서 한화콘도에 이르는 고개에서 에스피노자와 마티아스가 떨어져 나갔다.

영국의 대학생 마라토너 네루카는 힘이 좋았다. 씩씩대며 이봉주 뒤를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당시 결승선은 경주현대호텔 정문 앞. 길가에선 수많은 경주시민이 손에 땀을 쥐며 “이봉주 파이팅”을 외쳤다. 이봉주는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진드기 같이 따라붙던 네루카도 조금씩 뒤처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봉주가 네루카를 약 27m 앞서 5초 차 우승(2시간 10분 58초). 이봉주의 생애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역전 우승 땐 통쾌함 두 배

이봉주의 두 번째 트랙게임 승리는 올 3월에 열린 2007 서울국제마라톤. 결승선을 1.575km 앞둔 40.62km 지점. 한때 30여 m까지 떨어졌던 이봉주가 어느새 케냐 키루이(27)와 어깨를 나란히 하더니 갑자기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길가 시민들은 처음엔 설마 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원 세상에!”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목이 터져라 응원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봉주는 2시간 8분 04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맨 먼저 통과했다. 약 137m 뒤에 처진 키루이는 25초 늦은 2시간 8분 29초에 2위로 골인했다.

▼서브스리 마스터스 윤용운 씨 “숨 끊어질 듯 고통… 몰입 순간은 너무 짜릿”▼

트랙게임은 엘리트 선수들만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인 마스터스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엘리트 선수들의 트랙게임은 피를 말리는 처절한 경주다. 하지만 마스터스에게는 그런 절박함이 필요 없다. 그저 트랙에 들어섰을 때 ‘앞선 주자를 하나 둘씩 제치기’만 하면 된다. 보통 마스터스의 경우 경기장 트랙에 들어서면 자신보다 앞서 달리는 주자가 많다. 이들은 거의 자신과 기록이 비슷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앞서갈 수 있다. 내심 즐긴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승부를 벌여 봄 직한 것이다.

60대 서브스리 마스터스 윤용운(64) 씨는 마지막 트랙 승부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7년 경력에 15번 넘게 풀코스 완주. 2004년과 2005년 트랙 승부로 서브스리를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들어왔다. 2004년 2시간 59분 51초, 2005년 4초 앞당긴 2시간 59분 47초.

“마라톤은 과학이다. 난 마지막 1km에 승부를 건다. 그 전까진 오버하지 않고 참고 또 참는다. 트랙에 들어서면 내 모든 힘을 다 쏟아 붓는다. 머릿속은 텅 비고, 가슴은 숨이 끊어질 듯 아프지만, 몰입하는 그 순간이 너무너무 짜릿하다. 보통 트랙에서 7, 8명을 따라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최선을 다해 달린 것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다. 물론 나를 추월하는 마스터스도 반드시 1, 2명은 있다. 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대단하다, 경이롭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 결승선에 들어와서 힘이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나 자신에게 마구 화를 낸다. ‘왜 마지막 한 방울까지 힘을 쏟지 못 했는가’ ‘왜 결승선을 통과한 뒤 쓰러질 정도로 달리지 못 했는가’에 대한 자책인 것이다.”

트랙게임을 벌이는 선수들은 모두가 승자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그들은 42.195km의 105리 길을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쏟아 부으며 달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마른 수건에서 또 물을 짜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새 중에서 쉬지 않고 가장 멀리 날아가는 것은 ‘큰됫부리도요’다. 이 새는 1만 km가 넘는 거리를 2000m 상공에서 평균시속 56km로 쉬지 않고 6∼7일을 날아간다. 몸길이 41cm, 몸무게 250g. 이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면 지방과 근육 속의 에너지가 모두 바닥나 뼈와 가죽만 남는다. 42.195km를 달려온 마라토너도 도요와 닮았다. 한번 완주하고 나면 몸무게가 3∼4kg 빠진다. 뼈와 가죽만 남은 그 몸으로 마지막 승부를 벌이다니! 마라톤 트랙게임은 ‘영혼의 게임’이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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