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④번이다. 앞에 예를 들지 않은 이유는 언뜻 생각나지는 않지만 이름만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그런 선수이기 때문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항상 최고와 어깨를 나란히 한 ‘만년 2인자’, 바로 김시진(50·사진) 전 현대 감독이다.》
“36년 만에 갑작스러운 야구野人
새출발하는 마음으로 복귀 준비”
그는 지도자로서도 현대에서 1998년과 2000, 2003, 2004년 네 번의 우승을 이끌며 ‘투수 조련사’란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는 사령탑인 김재박(LG 감독) 감독의 몫이었다.
지난해에는 동기들에 비해 뒤늦게 감독 꿈을 이뤘지만 지난달 팀이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로 넘어가는 바람에 계약 기간을 2년이나 남겨둔 상태에서 중도 사퇴하는 비운까지 맛봤다.
그는 요즘 매일 아침 인천 남구 문학동 집 부근의 문학산을 오른다. 낮잠도 자고 때로는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야구 인생 36년 만에 처음 맞는 여유다.
14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야구판에서 소외됐다는 게 견디기 어렵다”면서도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야구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식 같은 선수들을 떠나다
김 전 감독은 2일 박노준 센테니얼 단장의 전화를 받았다. “수석코치를 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는 거절했다. 일부 코치와 선수를 정리하겠다는 단서 조항 때문이었다.
이튿날 박 단장이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김 전 감독은 자신의 연봉 2억 원 가운데 절반을 내놓고 1년만 더 팀을 꾸려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새 감독이 정해졌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 전 감독은 4일 경기 고양시 원당구장에서 현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동안 함께 고생했는데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센테니얼이 현대 선수단을 100% 고용 승계해 준 데 대해선 고마워했다.
○KBO 경기위원-칼럼니스트로
김 전 감독은 최근 지인의 추천으로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의 인스트럭터 연수를 알아봤지만 자리를 찾지 못했다. 너무 늦게 연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경기운영위원을 제안 받은 상태다. 곧 창간되는 스포츠동아에 야구 칼럼도 쓰기로 했다.
“오히려 제3자 관점에서 야구를 폭넓게 볼 기회가 될 것 같다. 그동안 항상 그라운드에서만 야구를 보지 않았나.”
○“후진 양성이 내 존재 이유”
김 전 감독은 포항중 2학년 때 반 대항 야구를 하다가 야구부 감독에게 즉석 스카우트되면서 선수가 됐다. 한양대와 경리단을 거쳐 1983년 삼성에 입단한 그는 1985년 25승, 1987년 23승을 거두며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1988년 오른손 엄지 골절을 당한 이듬해 롯데로 트레이드되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는 “삼성에서 버림받고 롯데에서 4년간 13승을 거둔 게 전부였다. 선수 생활에서 치욕적인 기억이었다”고 회상했다.
‘하늘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 나이가 된 김 전 감독의 새로운 목표는 무엇일까.
“내 인생은 야구밖에 없다. 약삭빠른 세상에서 다른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남은 시간 선수를 키우는 일이 나의 존재 이유다.”
김시진은
▽1958년 3월 20일생 ▽포항중, 대구상고, 한양대 졸업 ▽1983년 삼성 입단, 1989년 롯데로 트레이드, 1992년 은퇴 △통산 124승 73패 16세이브 ▽1985년 25승 5패, 1987년 23승 6패로 다승왕 ▽1993∼1995년 태평양 코치, 1996∼2006년 현대 코치, 2007년 현대 감독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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