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호 “기술거는 재미 요즘도 끝내줘요”

  • 입력 2008년 5월 9일 09시 18분


○살아있는 전설

3월 23일 제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아시아시니어레슬링선수권대회. 경기장은 베이징올림픽 여자레슬링에서 2개 이상의 금메달을 노리는 일본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한 일본 기자가 심권호(36·주택공사코치)의 근황을 물었다. 그는 “심권호는 역대 그레코로만형 세계최고의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한 달 뒤 태릉에서 만난 2004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정지현(25·삼성생명). 심권호와 비교하자 “심 코치님과 나는 비교가 안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마침 1996애틀랜타올림픽과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심권호를 지도했던 방대두(국군체육부대) 감독이 태릉훈련장을 찾았다. 방 감독은 “(정)지현이도 뛰어난 선수지만 (심)권호한테는 아직 멀었다”면서 “심권호는 5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고 했다. 은퇴한 지 4년이 흘렀지만 어딜 가나 심권호 얘기다. 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세계선수권·올림픽을 2연패한 유일한 선수. 그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타고난 몸

분당 서현고등학교 연습장에서 심권호를 만났다. 심권호는 현역시절처럼 탄탄한 체구를 유지하고 있다. 주택공사 팀탁터인 한체대 남정훈 연구원은 “심권호의 몸은 타고 났다”고 했다. 상대 선수를 조이는 힘이 나오는 활배근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 손으로 만져봤더니 등 양쪽에 주머니가 달려있는 것 같다. 정지현은 “현역으로 뛰고 있는 내가 잡혀도 숨이 막히고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심권호는 “체질적으로 근육량이 잘 유지된다”고 덧붙였다.

근육이 단단하지 않고 부드럽기까지 하다. 심권호는 양 손을 비틀어 등뒤로 넘기는 자세까지 보여줬다. 마치 요가수련을 한 사람처럼 유연하다. 방대두 감독이 “심권호는 큰 기술이 걸려도 (몸이 유연해) 공중에서 몸을 돌리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1점만 허용한다”고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노련할수록 반칙왕?

심권호의 몸은 여전히 레슬링을 원한다. 심권호는 “내가 먼저 기술을 써봐야 그 기술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이론만으로는 지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수들과 자주 매트에서 나뒹군다. “아직도 한 체급 위까지는 적수가 없다”고. 대학선수들은 ‘가지고 노는’ 수준이다.

“그래도 힘이 좀 달리지 않냐”고 했더니 “레슬링에서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하우”라고 했다. 팔을 잡아보라고 해서 잡았더니 슬쩍 팔을 뻗어 관절을 꺾었다. 당연히 팔을 잡은 손은 빠져나갔다. “상대의 관절이 굽혀지는 반대쪽으로 힘을 주면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반칙성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노련미. 레슬링에서는 손가락 관절을 꺾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심권호는 “손가락을 잡으면 아무리 힘이 센 상대라도 끌려 올 수밖에 없다”면서 “선수 시절 심판 몰래 많이 사용했던 기술”이라고 털어놓았다. 심판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면 어떻게 할까. 심권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이 잡고 있는 손가락을 심판에게 보여준다. 상대가 내 손가락을 잡고 있으니 반칙을 선언해달라는 적반하장식 항의. 상대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기술을 성공시켰다. 그레코로만형에서 금지되어 있는 하체공격과 수비도 교묘하게 사용했다. 경기를 마친 뒤 “너와 경기하면 꼭 사기당하는 기분이 든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고. 심권호는 “심판과 룰을 활용할 수 있어야 최고의 선수가 된다”고 했다.

○레슬링이 가장 쉬웠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다섯 살 때 한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데 아직도 하루 여섯 시간씩 연습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연습을 한다”고 답했다.

선수시절 심권호는 방대두 감독과 매트에서 장난을 치다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권호는 “아직도 새로운 방법으로 상대를 넘길 수 있다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레슬링에 관해서라면 도저히 배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심권호지만 자나 깨나 레슬링 생각 뿐이다.

1996애틀랜타올림픽에서 48kg급 금메달을 딴 후 그 체급이 없어졌을 때 모든 사람들이 “한 체급 높이면 안된다”라고 했다. 하지만 심권호는 ‘어차피 금메달 한 번 따봤으니 안되면 말자. 레슬링 말고는 재밌는 것도 없지 않나’는 생각으로 덤볐다. “그때는 단지 나를 시험해 보자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결국 심권호는 2000시드니올림픽 54kg급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에서 체급을 올려 성공한 선수는 심권호와 강용균(북한)뿐. 한 번의 금메달은 타고 난 것으로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슬링이 가장 쉬웠고, 재밌었다”고 말할 정도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시련을 딛고 일어서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취미를 물었다. 심권호는 또 “레슬링”이라고 답했다.

성남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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