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 ‘눈물의 200승’

  • 입력 2008년 5월 12일 08시 36분


“(200승을)빨리 올리고 싶지요.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부담을 많이 갖는 것 같아서….”

백전노장도 90분 뒤 찾아올 자신의 운명을 모르고 있었다. 역사적인 경기를 앞둔 대전시티즌 김호(64) 감독은 애써 부담을 털어내려는 듯 말꼬리를 흐렸지만 스승에게 값진 선물을 안기고픈 선수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대전은 11일 부산 구덕 운동장에서 열린 부산 아이파크와의 2008 삼성하우젠 K리그 9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전반 25분 이여성의 첫 골로 리드를 잡은 뒤 후반 19분 김승현에게 페널티골을 내줘 또 한번 대기록이 연기되는 듯 했다.하지만 종료 직전 터진 이성운의 결승골에 힘입어 2-1 짜릿한 승리를 챙겼다. 김 감독이 프로 첫 200승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김 감독과 대전 선수들에겐 3년보다 더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지난달 26일 전북 현대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김 감독은 통산 199승을 기록했지만 이후 울산 현대와 경남 FC에 내리 덜미를 잡혀 기록 달성이 계속 미뤄져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 감독은 7일 불의의 교통 사고로 며느리와 손자를 한꺼번에 잃는 아픔까지 겪었다.

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대전 선수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백발이 성성한 노장의 두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오직 축구 하나만을 보고 달려온 수십년 외길 인생. 줄곧 “기록 달성은 의식하지 않는다”던 김 감독이었지만 경기 후 “그 어느 때보다 최근 3경기가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김 감독은 “25년 프로축구에서 정말 기쁜 일”이라며 “많은 축구인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다.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지도자들이 좋은 기록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했다.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슬픔도 꾹 눌렀다. 휴대폰 화면에 손자의 사진을 저장하고, 재롱떠는 동영상을 담아 주위 사람들에 자랑해온 김 감독이었다. 그는 “축구인은 가족도 중요하지만 먼저 축구의 길을 걸을 뿐이다. 대전은 어려운 상황에서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고 담담한 어조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사실 일찌감치 대전의 승리가 예견됐다. 황선홍 부산 감독은 “(김)감독님께 선물을 안기고 싶지만 제 코가 석자라…”고 말꼬리를 흐린 반면, 김 감독은 “솔직히 이기고 싶다. 황 감독에게 살살하라고 전해달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킥오프 2시간 전 구덕 그라운드에 도착한 대전 선수단 최고참 최은성은 “어쩐지 이번에 우리가 2골을 넣고, 한 골을 내줘 2-1로 이길 것 같다”고 말했다. 승리는 물론, 스코어까지 맞힌 뒤 후배들과 기쁨을 함께 하던 최은성은 엄지를 치켜세운 뒤 “거봐요, 제 말이 맞죠”라고 미소를 지었다. 온 몸을 불사르며 최고의 수비를 보인 김형일도 “너무 부담갖지 말고, ‘우리가 할 것을 하자’고 동료들끼리 약속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결승골의 주인공, 이성운은 “김호 감독님은 제 축구 인생의 전환점이 된 분이다. 올 시즌 최종전이란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먼 길을 직접 찾아 승리의 기쁨을 누린 송규수 대전 사장은 즉석에서 승리 수당을 원정 수당(250만원)이 아닌 홈 수당(350만원)으로 책정했다고 발표, 스트레스를 떨친 선수들을 기쁘게 했다.

부산=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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