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댓바람부터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남편한테 만날 내 자랑을 늘어놓으니 말만 말고 실력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단다. 내친 김에 친구 남편 중에 가장 실력이 좋다고 하는 3명한테는 이미 연락도 해놨다고.
헉, 순간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가슴은 이미 방망이질을 해대고.
하지만, 뭔가 이벤트가 걸리면 남다른 전투력이 생기는 나, 김또순이 아니던가.
한번 붙어보지 뭐. 남자들이랑 붙어서 잘하면 영광이고, 못해도 뭐 본전인데. 날이 날인만큼, 보통 우리끼리 할 때 보다 5배나(?) 더 센 게임이 시작되었다.
오고가는 현금 속에 전반 홀은 거의 비슷비슷하게 서로의 실력을 살피는 것으로 끝이 나고, 드디어 후반.
그런데 오 마이 갓 ! 오호∼∼∼ 그 님이 오셨다.
골프에선 그 님이 오시는 날이 있다. 유명한 프로골퍼들도 우승하는 날은, 꼭 뭔가 쓰인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절대 공감이다.
그 날은 정말, 다시 못 올 지도 모르는 그 님이 오신 듯 했다.
어프로치 하면 그냥 착착 홀에 가서 붙어주고, 혹 실수라도 하면 퍼트에서 100% 만회를 해주니, 정말이지 거짓말같이 공이 홀로, 홀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모르는 그 님이, 뒤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난 마지막 홀을 아웃할 때, 73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기록하고 말았다.
오∼∼∼ 신이시여. 원 오버라니. 여자들 중에서 쫌 친다고 소문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닌데, 어쩜 좋아. 내 생애 최저타를 기록하고, 머니도 따고, 아줌마의 체면도 팍팍 세워주고, 암튼 인생 최고의 날이다.
동반했던 남자들도 나름 소문난 골퍼들인데 나보다는 한참 모자라는 79, 78타. 어떤 이는 나의 기에 눌렸는지 최악의 스코어라며 85개를 기록했다.
다들 혀를 내두르며 나의 실력을 칭찬해줬다. 뭐 속으로야, 저 여자 밥은 안하고 만날 골프만 치러 다니나 했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마누라 과부 만들며 만날 골프투어 다닌 자기네들보다 일단은 내가 한수 위라는 거∼∼
오늘 와주신, 고마우신 그 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와주시기바래용∼∼
그 날 이후, 친구가 하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덕에, 연습장에서 난 완전 인기스타가 됐다.
한수 가르쳐달라는 사람, 한번 모시겠다는 사람, 그냥 멀찍이서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 첨엔, 뭐 으쓱으쓱한 맘도 있었지만, 어디 스윙 흐트러질까봐 연습도 제대로 못하겠다. 본의 아니게, 의상도 신경 쓰게 되니 참, 인기인으로 사는 게 쉬운 건 아니군.
삐리리리∼∼∼ 뭐, 다른 도전자가 나타났다고? 얘 좀 봐.그 날은 그 님이 오셨으니 그런거고, 그 님이 뭐 그렇게 내 맘대로, 아무 때나 오시니?
창피당할까 무섭기도 하고, 또 우아하게 그때의 내 모습만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맘에서 정중하게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 했다.
오∼∼∼ 님이시여 !! 언제 즈음 다시 제게 와 주실 건가요?
박 희
방송 PD출신으로 산책과 요가를 즐기고 언제나 굿샷을 날리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영원한 골프마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