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 2일자 본보 1면 톱기사 제목이다.
‘온 국민이 염원하던 금메달을, 한국이 낳은 장한 아들 양정모 선수가 제21회 올림픽 ‘몬트리오올’대회 레슬링 자유형 종목 페더급에서 드디어 쟁취하였다. (중략) 사상 처음으로 애국가가 장엄하게 세계만방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자랑스러운 태극기가 ‘몬트리오올’ 하늘에 휘날리자 모두는 제어할 수 없는 감격에 복받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기사 원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작고) 선생의 우승은 식민지 설움에 울던 한민족의 쾌거였다. 하지만 손기정 선생의 금메달은 일본의 금메달로 기록됐다.
우리 선수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48년 런던 대회가 처음이었고 시상식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은 28년이 더 지나서였다. 몬트리올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금맥을 발견한 한국은 이후 6번의 올림픽에서 54개의 금메달을 보탰다. 온 국민의 뜨거운 응원과 감동 속에 시상대 맨 꼭대기 위에 올랐던 금메달리스트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몬트리올 대회 때 23세 청년이던 양정모는 55세 교수님이 됐다. 동아대 초빙 교수로 체육학과 학생들을 가르친다. 1998년 감독으로 있던 조폐공사 레슬링 팀이 해체되면서 현장을 떠났다.
‘대한민국 1호 금’의 주인공 양 교수는 “그때만 해도 아주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훌륭하게 개최한 것을 보면서 가슴 뿌듯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올림픽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금메달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대에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며 금메달을 땄던 레슬링 김원기(1984년 로스앤젤레스)는 지도자가 아닌 삼성생명 직원으로 새 길을 찾았고 퇴직 후 상이군인을 위한 단체인 십자성마을회 전무로 일하고 있다.
역대 금메달리스트 가운데는 교수가 꽤 있다. 대부분 투기 종목 출신이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레슬링에서 김원기와 함께 정상에 올랐던 유인탁은 전주대 객원교수로 있고, 유도 하형주(1984년)와 태권도 문대성(2004년 아테네)은 동아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세계 정상에 올랐던 선수들인 만큼 지도자나 종목 단체 행정가의 길을 걷는 경우도 많다.
유도 안병근(1984년)과 레슬링 박장순(1992년)은 각각 유도 남자 대표팀과 레슬링 남자 자유형 대표팀 감독을 맡아 후배들의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탁구 현정화와 유남규(이상 1988년)는 탁구 대표팀 코치로 베이징에 있다. 배드민턴 하태권(2004년)은 복식 코치다. 배드민턴 박주봉(1992년)은 일본 대표팀 감독으로 한국과 맞붙는다.
대표팀 코칭스태프 외에 복싱 박시헌(1988년)은 상비군 감독으로 유망주를 키우고 있고 유도 이경근(1988년)은 마사회 감독이다. 마라톤 황영조(1992년)는 국민체육진흥공단, 레슬링 안한봉(1992년)은 삼성생명 그레코로만형 감독으로 재직 중이며, 여자 태권도 장지원(2004년)은 삼성에스원 코치로 일한다. 배드민턴 방수현(1996년)은 국제배드민턴연맹 이사다.
사업으로 성공한 경우도 있다. 레슬링 김영남(1988년)은 카자흐스탄에서 건설사를 운영하며 크게 성공했다. 국내에서 건설업을 하는 레슬링 한명우(1988년)는 대한레슬링협회 전무로 있으면서 후배들을 지원한다. 사격 이은철(1992년)은 정보기술(IT)업체 사장님이다.
추억 속에 아련한 인물도 없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금메달리스트들이 올림픽 때면 ‘반짝 해설가’로 변신한다.
17세 때인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 단체전 우승까지 한국의 하계 올림픽 사상 최다인 4관왕에 오른 여자 양궁 김수녕은 배드민턴 방수현 등과 함께 MBC 해설위원을 맡았다. 레슬링 2연패의 주인공 심권호(1996, 2000년)와 양궁 김경욱(1996년), 황영조, 문대성은 SBS 해설위원으로, 복싱 김광선(1988년), 역도 전병관(1992년), 배드민턴 김동문(2004년), 유도 이원희(2004년)는 KBS 해설위원으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베이징=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