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린 보이’ 금메달 따기까지
일반 성인보다 2배나 큰 폐활량-유연성 ‘될성부른 떡잎’
中3때 아테네대회서 부정출발로 실격… 4년 절치부심
“다시는 실수 안한다” 24주 지옥훈련 이겨내고 영웅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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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물을 만나다
‘마린 보이’ 박태환(19·단국대)은 1989년 9월 27일 박인호(57) 유성미(50) 씨 부부의 1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던 박태환은 5세 때 동네 수영장을 다니면서 수영을 처음 접했다. 하지만 박태환은 곧 수영 선수로의 자질을 보이며 ‘될성부른 떡잎’이 됐고 박태환의 부모는 전문 수영선수로 키울 결심을 하게 된다.
운명은 묘했다. 박태환이 7세 때 박태환의 부모가 수소문해 찾아간 곳이 노민상 현 수영대표팀 총감독이 운영하는 ‘윈윈클럽’이었다.
체계적인 교습을 받으며 박태환의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색소폰 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폐활량과 무용을 했던 어머니에게 받은 유연성까지. 어쩌면 수영 선수로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무기들을 타고난 박태환에게 수영은 운명 같은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노 감독의 훈련 속에 다듬어진 박태환은 소년체전에서 우승을 거듭하며 이름을 떨치게 된다. 결국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김봉조 수영대표팀 감독에게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전체 한국 선수단 최연소 선수의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 시련을 맞다
2004년 8월 14일 그리스 아테네 아쿠아틱센터. 경영 첫날 남자 자유형 400m 예선 출발대에 선 박태환은 잔뜩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교 3학년인 나이에 최고의 대회에 섰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결국 심판의 ‘스타트 준비∼’란 구령에 앞으로 고꾸라지며 물 속에 빠져버렸다. 부정출발이었다. 올림픽에서는 스타트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실격 처리된 박태환은 팔 한 번 저어 보지 못한 채 한국행 짐을 쌌다. 탈의실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던 소년 박태환은 “다시는 스타트에서 실수하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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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록을 향해 뛰다
좌절은 짧았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허무하게 물러난 그해 11월 박태환은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국제수영연맹(FINA) 경영월드컵 자유형 1500m에서 준우승하며 자신감을 회복했다.
박태환은 이후 각종 국제 대회에 출전하며 경험을 쌓고 자신의 기록을 차근차근 앞당겼다. 4월 중국 상하이 FINA 쇼트코스(25m)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 2개를 땄고, 같은 달 동아수영대회 등에서 한국신기록을 무려 8개나 쏟아냈다. 박태환이 떴다 하면 신기록이 세워지는 황금기였다.
박태환은 2006년 12월 열린 도하 아시아경기에서 자유형 200m, 400m, 1500m를 모두 휩쓸어 3관왕에 오르며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 결별, 그리고 재회
호사다마였다. 2007년 새해 벽두. 박태환은 10년 넘게 자신을 가르쳤던 노 감독과 결별을 선언했다. 각종 추측이 난무했지만 ‘노 감독이 대한수영연맹 경영 총감독을 맡고 있어 박태환을 집중 조련하기 어렵다’는 게 박태환 측의 이유였다. 그 대신 박태환은 서울 대치동 집 근처의 종합스포츠센터에서 개인 훈련을 했다.
하지만 노 감독은 “제자와 한번 맺은 인연이 끊어질 수 있겠는가. 언제든지 다시 온다면 받아줄 준비가 돼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이후 박태환은 기록 상승세가 주춤해졌고, 주위의 높았던 기대만큼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별은 오래가지 않았다. 올해 2월 박태환이 수영국가대표팀의 말레이시아 전지훈련캠프에 전격 합류하면서 14개월여 만에 노 감독과의 재회가 이뤄진 것. 노 감독은 돌아온 애제자의 등을 말없이 두들겨줬다.
이후 한국 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52세 베테랑 노 감독과 19세 청년이 된 박태환의 집념의 승부가 펼쳐진다. 박태환은 24주간의 특별 훈련을 거쳐 유연성과 파워에 자신감까지 얻었다.
그리고 10일 베이징 워터큐브 수영장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12년 전 한 동네 수영장에서 만난 중년의 감독과 허약한 천식 소년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베이징=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