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서정보]‘굿 트라이’

  • 입력 2008년 8월 19일 03시 01분


‘굿 트라이(Good try·좋은 시도야).’

미국 연수 1년 동안 축구를 좋아하는 초등학생 아들이 동네 축구리그에서 경기를 벌일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아들이 가입한 축구팀은 주 2회 연습을 하고 주말에 한 번 인근 지역 축구팀과 실전을 벌였다. 주말에 경기가 열릴 때면 선수의 부모나 형제자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나와 간이의자와 파라솔을 펴놓고 열심히 응원한다.

초등학생들의 경기니 헛발질에 패스미스가 남발하고 공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어쩔 수 없다.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응원하는 미국 부모들이 아이들이 평소보다 조금만 공을 잘 차거나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면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이 꼭 ‘굿 트라이’를 외치며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슛이 골대와 한참 빗나가도, 상대편을 한 번 제쳤다가 다시 빼앗겨도, 모처럼 코너에서 센터링한 공이 골키퍼에게 잡혀도 이들은 주문처럼 ‘굿 트라이’를 연발했다. 아이에게 한국말로 ‘왜 서 있어. 빨리 움직여야지’ ‘슛을 그렇게 엉망으로 하면 어떡해’라고 한국식으로 고함치던 한국 아빠는 머쓱해졌고 어느덧 다른 미국 부모들과 같이 ‘굿 트라이’를 외치기 시작했다.

올 2월 귀국한 아들은 이번엔 학교 축구단에 들어갔다. 역시 주말에 연습과 경기를 번갈아 했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아들의 경기를 보러 갔다. 상대편이 강한 팀이었는데 아들 팀이 연속으로 골을 먹었다. 아들 팀에서도 훌륭하지만 실패한 시도들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 대해서 안타까운 반응만 있었을 뿐 ‘굿 트라이’가 없었다. 중간 휴식 시간에도 아이들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야 된다’는 주문을 듣기 바빴다. 물론 더 잘하라는 자극을 주는 것이긴 했지만 아이들은 변변한 칭찬을 듣지 못한 채 경기를 마쳐야 했다. 어릴 적부터 ‘굿 트라이’를 듣고 자란 아이들과 잘했을 때만 칭찬을 듣고 자란 아이들은 분명 차이를 보일 것 같았다.

5월에 방영된 EBS 다큐멘터리 ‘동기’는 성공에 대한 칭찬보다 노력에 대한 칭찬이 아이들에게 차후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겠다는 목표의식을 갖게 한다는 점을 실험으로 보여 줬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판승 행진을 벌이며 금메달을 딴 유도 최민호 선수는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고도 금메달을 딴 이원희 선수의 그늘에 가려 인정받지 못하자 ‘죽을 만큼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하룻밤에 소주 7병을 마실 정도로 자포자기했다고 한다.

다행히 이번 올림픽에선 금메달 지상주의는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 은메달 동메달에도 칭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첫날부터 거의 매일 금맥을 캐며 선전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도 든다. 아직도 ‘굿 트라이’에 대한 칭찬에는 비교적 인색하다.

최근 인터넷에 ‘축구장에 물 채워라, 박태환 수영하게. 겨울에는 물 얼려라, 김연아 스케이트 타게. 골대는 놔둬라, 장미란이 다 뽑게…’라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예선 탈락에 대한 질책이다. 축구팀에 걸었던 기대가 커서 실망도 큰 법이고 웃자고 만든 패러디이긴 하지만 이를 보는 축구 대표선수들의 심정은 ‘죽을 만큼 괴로울지도’ 모른다.

비록 이번엔 실패했다고 해도 스포츠에는 늘 다음 기회가 있지 않은가. 실패를 이기는 힘은 질책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다.

서정보 문화부 차장 suhcho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