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간의 ‘베이징 열전’이 남긴 것
회사원 조의준(52) 씨는 이 경기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시상식을 꼽았다. 조 씨가 1회초, 9회말 등의 명장면 대신 시상식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렇다.
“예전엔 올림픽 구기종목을 보면 한국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에 비해 너무 왜소해서 안쓰러웠어요. ‘불굴의 헝그리 정신으로 이를 악물고 싸워야만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냥 들었죠. 이번에 보니까 한국 선수들 체격이 외국 선수들과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또 시상식 위에서의 매너도 외국 선수들처럼 자연스럽고 자신감 넘쳐 보이더군요.”
조 씨의 말은 기적이 아니라 순수 실력으로 이겼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 No ‘헝그리 정신’, Yes ‘고급스러운 자신감’
과거에도 올림픽에서 얻은 성과로 사회분위기가 활기차게 바뀌고 국민이 자신감을 얻는 경우가 있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과거엔 단순히 메달을 많이 땄다는 ‘양적인 성취감’과 가난하고 배고픈 환경을 극복한 ‘인간 승리’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젊은 신세대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체격 조건(기본조건)에서부터 선진국에 밀리지 않았다. 이들이 선진국들과 대등하게 경쟁해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였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야구 수영 펜싱 사격 등 서구 선수들의 체형 조건에 훨씬 더 적합한 종목에서 메달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 대표적인 사례. 김정운(문화심리학)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교수는 “이른바 선진국 강세 종목에서 메달이 많이 나왔다는 게 큰 변화”라며 “이를 통해 헝그리 정신에 바탕을 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식에서 벗어나 ‘우리도 당연히,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고급스러운 자신감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수영과 야구에서 금메달이 나온 배경에는 다양한 수영장과 수영 레슨 프로그램, 세계에서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수준 높은 프로야구 리그를 가지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며 “이번 올림픽에서 얻은 성과는 우연 혹은 기적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투자해 온 인프라의 결과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 경쟁적인 올림픽 대신 즐거운 올림픽
여자핸드볼 대표팀(동메달), 왕기춘(유도·은메달), 이배영(역도·부상으로 실격), 이봉주(마라톤·28위) 등 금메달을 따지 못했거나 노메달에 그친 선수들에게도 뜨거운 관심과 격려가 쏟아졌다는 것도 큰 변화다. 이는 단순 승패가 아닌 진정한 만족과 성취를 추구하는 성숙한 사회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번 올림픽 참가 선수들이나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승패를 떠나 경기를 즐기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도 올림픽 메달을 국가와 민족의 차원으로 파악하려는 언론과 정치권보다 오히려 한 수 앞서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도 “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얼굴의 이미지나 말씨, 몸짓 등이 마음에 들면 인터넷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몰입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이것은 시민들이 올림픽 자체를 자율적으로 즐기려는 문화적 변화”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변화는 우리 사회와 문화의 성숙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대학을 미국에서 나온 한국암웨이 진혜원 씨는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메달 순위나 금메달리스트뿐 아니라 이색 종목, 아쉽게 탈락한 선수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한국도 문화적으로 정말 선진국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긍정적 경험의 공유…인터넷 공간도 오랜만에 훈훈
한편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선전으로 경기침체, 촛불집회 등으로 가라앉아 있던 사회분위기가 다시 꿈틀거릴 수 있을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최근 우리 사회에 갈등이 심했지만 올림픽의 긍정적인 현상에 대한 공유가 사회분위기를 쇄신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갈등의 장’이었던 인터넷 공간에서도 오랜만에 화합과 따뜻한 글이 넘쳤다는 것도 긍정적인 현상으로 꼽을 만하다.
올림픽 기간 내내 ‘온라인 응원’이란 이름 아래 긍정적인 인터넷 댓글 달기가 계속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에 따르면 8월 9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 이후 문자중계의 댓글 수는 하루 평균 3만여 건에 육박했다. 특히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거나 야구 한일전 등 중요 경기가 있을 때에는 선수들을 격려하는 댓글이 하루 10만 건에 이르기도 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