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친과 함께
1996년 7월 4일.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전남 완도군청에 근무하던 스물두 살의 이윤리는 친구와 함께 승용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차는 고여 있는 빗물을 피하려다 비탈길에서 굴렀다. 꿈 많던 그는 척추를 다쳐 1년 반 동안 병원에 있어야 했다.
2008년 9월 9일. 휠체어에 앉은 이윤리는 무거운 소총을 든 채 만세를 불렀다. 사격 여자 50m 소총 3자세 결승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사고 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던 이윤리는 걱정하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총을 잡은 건 2년이 조금 넘었다. 2006년 1월 대전보훈병원 사격장에서 재미삼아 쏴 본 게 인연이 됐다. 마침 같은 병원에는 부상 치료차 온 특전사 저격수 출신 동갑내기 이춘희 씨가 있었다. ‘전문가’ 이 씨는 사격의 재미에 빠져들던 이윤리를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이윤리의 사격 실력은 깜짝 놀랄 만큼 급성장했다. 지난해 독일오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위를 했고 올 6월 제1회 서울컵에서는 한국 신기록과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해 사격계를 놀라게 했다.
베이징까지 날아가 개인 코치를 자처했던 이 씨는 이윤리가 귀국하는 대로 조만간 청혼을 할 계획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 아내와 함께
남편이 쏜 총알이 표적지 한가운데를 통과했다. 옆에 있던 아내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9일 혼성 10m 공기소총에서 705.3점을 쏴 프랑스의 라파엘 볼츠를 0.2점 차로 누르고 짜릿한 금메달을 목에 건 이지석은 평소 “힘들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하반신을 쓰지 못한다. 양손에도 제대로 힘을 줄 수 없다. 이런 척수 장애 사격 선수들은 실탄 장전 등 사격 발사 이전에 필요한 일들을 도와주는 보조 요원을 둘 수 있다. 이지석과 사격장에 나란히 서 있던 보조 요원은 바로 아내 박경순(31) 씨였다.
이지석은 2001년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재활 과정에서 간호사였던 박 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2006년 힘들게 결혼에 골인했다. 이날 박 씨는 때로는 조언을 했고, 그보다 더 많이 기도를 했다. 마지막 10번째 실탄을 총에 넣어 준 뒤에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남편의 발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교만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해 달라’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장내 아나운서가 이지석의 금메달 확정 소식을 알리는 순간 아내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 세례를 했다. 힘든 세월을 이겨낸 아내의 배 속에는 사랑하는 남편의 6개월 된 아이가 자라고 있다. 남편은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사격 선수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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