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베어스가 라커룸에 지문인식기를 설치하려다 그만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몇몇 선수들의 손에 지문이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박노해의 시(지문을 부른다)에서 화공약품공장 노동자들의 손에 지문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야구선수의 손에 지문이 없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훈련이기에. 두산의 마무리 훈련이 한창인 잠실구장을 찾았다.
○야구는 언제해요?
마침 점심식사시간. 헐렁한 운동복을 입은 기자 사이로 매끈한 유니폼을 입은 두산 선수들이 지나간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에서 디카프리오의 아버지가 디카프리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양키스가 왜 이기는 줄 아냐? 핀스트라이프 때문이지.”
야구를 잘 하는 사람을 더 빛나게 해주고, 못 하는 사람도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유니폼이다. 보급 창고를 찾았다. 바지는 챙겨 입었지만 복부와 머리를 압박하는 벨트와 모자가 문제였다. 최준석(25) 등 우람한 선수들이 쓰는 벨트로 교체. 모자도 겨우 59호로 맞췄다. 상의는 유격수 김재호(23)의 것을 빌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니, 제법 야구선수 태(態)가 난다. 볼록한 올챙이배만 빼고.
김광수(49) 수석코치의 소개로 연습시작. 가벼운 러닝 후 가볍지 않은 스트레칭 시작. 벌리고, 찢고, 접고. 온 몸이 공작 종이가 된 기분이다. 초겨울 바람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옆 자리를 보니,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손시헌(28). “대체 야구는 언제 하나요?”, “벌써 힘드세요? 아직 한 참 남았는데…….”
조를 나눠 어깨동무 후 다리 들기 100회. “하나! 하나, 둘! 하나, 둘, 셋!” 다리가 풀려 잠시 박자를 쉬어야 하는 타이밍에도 계속 다리를 올렸다. 조원 전체가 처음부터 다시. 처음에는 넓은 아량으로 미소를 짓던 선수들도 슬슬 화가 나는 모양이다. “기자님, 무슨 에너자이저에요?” 해맑기만 하던 김현수(20)의 구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캐치볼, 팔이 땅에 닿도록!
1시간이 넘어서야 글러브를 꼈다. “이거는 투수 글러브네. ‘공 집’ 부분에 망이 있잖아.” 정체도 모르고 10년 가까이 쓴 글러브. 구질 노출을 막기 위해 투수용 글러브는 공 집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없도록 돼 있다.
캐치볼은 2006올스타전에서 시속145km를 던져 가장 강한 어깨를 가진 타자로 공인 된 손시헌과 함께. ‘공을 잡을 줄 안다’는 사실을 확인한 손시헌의 공이 점점 빨라진다. 송구거리가 멀어져도 직선으로 날아와 가슴팍에 꽂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던지는 비법. 김민호(39) 코치는 “던지는 팔을 땅에 닿을 정도로 쭉 뻗으라”고 강조했다. 몸의 중심을 앞으로 당겨 공에 힘을 실으라는 뜻. 민병헌(21)은 “던지는 순간, 검지에 힘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손가락은 중지가 더 길기 때문에 공이 손에서 빠져 나가는 순간, 중지가 더 오래 공에 닿아있다. 따라서 던진 공은 훅성으로 날아간다. 검지에 의식적으로 힘을 줘 두 손가락으로 동시에 공을 채야 직선으로 공이 나간다. 하지만 어설프게 했다가는 팔이 많이 불편한 것처럼 보이는 단점이 있다.
○수비는 무슨…, 토스볼부터 던져!
내야수비. 처음에는 펑고 몇 개를 쳐주는 훈련인 줄 알았다. 손시헌을 따라 유격수 수비위치에 섰다. 1,3루에 주자가 나갔다. 1루주자가 도루를 시도할 때, 다양한 수비포메이션을 연습하는 훈련이다. 박진감과 긴장감 넘치는 내야. 도저히 자신이 없어져 ‘멍’하니 있자 덕아웃에 있던 김경문(50) 감독이 사인을 냈다. ‘저건 무슨 사인일까?’ “교체!”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토스볼 던져주는 것부터. 배트를 쥔 선수의 허리 안쪽을 겨냥해야 하는데, 이것조차 제구가 안 된다. 이종욱(28)이 “이거 치다가는 폼 다 망가지겠다”며 웃자, ‘학다리’ 신경식(47) 원정기록원이 “정성이 없다”고 나무랐다.
이종욱에게 토스볼 한 상자(150개)를 던지고 나니 신인 김영재(22)가 배트를 쥐고 섰다. 10월, 연습경기에서 요미우리 번사이드에게 홈런을 쳤다는 그 선수.
신인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번에는 정말 정성스럽게 던지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두 손으로 토스볼을 던졌다가 신경식 원정기록원에게 또 한 번 혼이 났다. “두 손으로 던지라는 말이 아니라, 두 손으로 던진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라고 했지….”
○타격, 손바닥이 해어져 본 사람만이 알지
“언제까지 보조만 할 거야?” 김광림(47) 코치가 드디어 배트를 쥐어주었다. “자, 기마자세.” 김 코치의 토스볼. 30개가 넘어가자 몸에 힘이 빠진다. 그만둔다고 하기에도 쑥스러워 이를 물었다.
하지만 이를 물어도 안 되는 시점이 있다. ‘어쩌지? 그냥 드러누워 도저히 못하겠다고 할까?’ 몸의 중심이 틀려 ‘기우뚱.’ 김 코치는 그래도 공을 던졌고, 공은 몸에 맞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한 박스를 겨우 다 소화한 뒤에야 쓰라린 왼손을 한 번 만져볼 수 있었다. 붉게 물든 배팅장갑. 장갑을 벗었더니 왼손 검지와 중지 밑 손바닥 피부가 벗겨져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김)현수는 작년 스프링캠프 때 어땠냐 하면….” 김 코치가 때마침 지나가던 김현수를 불러 세웠다. 크고 단단한 손바닥에는 작은 혹같이 생긴 굳은살들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코치님, 왜 저는 선수들에게 굳은살 없는 부분도 까져 있죠?”, “아, 거기는 벗겨지는 부위가 아닌데 배트를 잘 못 잡았구먼. (배트) 잡는 법부터 다시.” 몸을 바치고도 욕먹었다. 역시, 모든 일에는 기본이 우선이다.
까진 손으로 또 배트를 잡고, 아물기 전에 또 살이 해어지면 굳은살이 박힌다. 배트와 손의 계속된 마찰은 심지어 지문을 배트에 옮겼고, 배트에 실린 지문은 야구를 보는 ‘혜안(慧眼)’이 됐다.
순간, 순박한 미소 뒤에 숨어져 있는 선수들의 독기가 무서워졌다. 홈런과 다이빙 캐치. 그 화려한 장면들은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그 플레이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슴에 뭉클함을 남긴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