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의 力士 사재혁, 시련을 이겼다…세계는 너무 가벼웠다

  • 입력 2008년 12월 19일 08시 56분


베이징올림픽에서 전병관(39·역도상비군 감독) 이후 16년만에 한국역도에 금메달을 안긴 사재혁(23·강원도청)은 올림픽 이후에도 강행군을 펼쳤다. 10월 제89회 전국체육대회와 11월 제9회 아시아남자클럽선수권에서 잇따라 3관왕을 차지했다.

8일 사재혁은 대표팀과 함께 뉴질랜드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대표팀은 휴식과 회복훈련을 병행해 헝클어진 몸을 추스를 계획. 새해부터는 11월 고양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을 대비해 본격적인 담금질에 들어간다.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생애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사재혁을 만났다. 사재혁은 “4번의 수술이 가져다 준 교훈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타고난 몸이 가져온 만용

홍천중학교에서 바벨을 잡은 뒤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재혁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2001년 4월. 훈련 도중 무릎에서 “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쇠도 씹어 먹을 것 같던 시절. 사재혁은 “까짓 것, 별 일 있겠냐”는 생각으로 계속 바벨을 잡았다. 무릎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며칠 후에는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한 달 뒤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이후에도 ‘하늘이 내린’ 몸을 믿었다. 체계적인 재활도 없었지만 회복력은 놀라웠다. 석 달 뒤 통증이 사라졌고, 다시 역기와의 씨름을 시작했다. 그 해 전국체전 3관왕.

사재혁은 “그 시절에는 ‘만용’이 있었던 것 같다”며 쑥스러워했다. 체육과학연구원(KISS) 문영진 박사는 “사재혁은 역도선수로서 타고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근육이 자라는 속도가 일반인과는 다르다.

○재수술을 통해 배운 겸손

2002년 전국체전 즈음, 이번에는 어깨에서 소리가 났다. 오기로 뛴 경기. 3관왕을 차지했지만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어깨 통증이 심해졌다. 2003년 3월 2일, 대학 입학식 날. 수술대에 누웠다. 기분이 좀 묘했다.

‘난 꺾이지 않는다.’ 첫 번째 수술 때처럼 통증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역기를 들었다. 욕심이 화근이었다. 숟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망가졌다. 병원에서는 “이제 운동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 이제 뭘 하지? 잘하는 것은 역도뿐인데….’ 주변에서는 “사재혁은 끝났다”라는 말도 들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해 11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칼을 댔다.

수술실에 누워있는 동안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팔·다리가 부러져 온 몸을 붕대로 휘감고 있는 사람, 심지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석 달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한 줄기 희망을 얻었다. 예전에는 거들 떠 보지도 않던, 지루한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통증 부위의 잔 근육을 발달시키는 보강훈련이었다. 큰 근육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사재혁. 미세한 근육까지 더해지자 근력이 폭발적으로 향상됐다.

○수술 기계를 망가뜨릴 정도의 강골

2년만에 참가한 2004년 전국체전. 사재혁은 69kg급에서 이배영(29)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 해 겨울 난생 처음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어머니 김선이(45)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말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흘렀다. “그래, 장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이제 다치지만 말자.”

어머니의 바람에도 하늘은 무심했다. 2005세계주니어선수권 1위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중 역기에 팔을 찧었다. 오른 손목 주상골 골절이었다.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주사를 맞았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의료진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골밀도가 워낙 높아 고가의 수술기계가 망가졌다”고 수군거렸다. “죄송합니다. 다시 좀 재워주세요.” 다시 마취를 했고, 새 기계를 가져온 끝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기계를 망가뜨릴 정도의 강골. 하지만 이번에도 충실히 재활에 임했다. 결국 결과는 금메달이었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

금메달리스트의 가장 큰 적은 목표의식의 부재.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역도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전병관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전병관은 “내 체중의 3배를 들겠다”는 목표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사재혁의 최종목표는 용상 215kg. 세계기록(210kg)을 5kg이나 넘어서는 대기록이다.

베이징올림픽 역도 77kg 결승전 직후 은메달을 차지한 리홍리(28·중국)는 “사재혁이 금메달을 딸 줄은 몰랐다”고 했다. 부상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사재혁은 국제무대에서 무명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타고난 몸을 가진 사재혁이 겸손을 배우지 못했다면 세계정상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또 한 번 크게 아프다면 그 때는 또 다른 교훈을 얻게 되겠지요.” 2007년 당한 팔꿈치 부상에서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한 사재혁. 하지만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 “이제는 통증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가 올림픽에서 든 합계 366kg의 원천에는 무한한 긍정의 힘이 있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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