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사재혁은 대표팀과 함께 뉴질랜드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대표팀은 휴식과 회복훈련을 병행해 헝클어진 몸을 추스를 계획. 새해부터는 11월 고양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을 대비해 본격적인 담금질에 들어간다.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 생애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사재혁을 만났다. 사재혁은 “4번의 수술이 가져다 준 교훈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타고난 몸이 가져온 만용
홍천중학교에서 바벨을 잡은 뒤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재혁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2001년 4월. 훈련 도중 무릎에서 “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쇠도 씹어 먹을 것 같던 시절. 사재혁은 “까짓 것, 별 일 있겠냐”는 생각으로 계속 바벨을 잡았다. 무릎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며칠 후에는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한 달 뒤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이후에도 ‘하늘이 내린’ 몸을 믿었다. 체계적인 재활도 없었지만 회복력은 놀라웠다. 석 달 뒤 통증이 사라졌고, 다시 역기와의 씨름을 시작했다. 그 해 전국체전 3관왕.
사재혁은 “그 시절에는 ‘만용’이 있었던 것 같다”며 쑥스러워했다. 체육과학연구원(KISS) 문영진 박사는 “사재혁은 역도선수로서 타고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근육이 자라는 속도가 일반인과는 다르다.
○재수술을 통해 배운 겸손
2002년 전국체전 즈음, 이번에는 어깨에서 소리가 났다. 오기로 뛴 경기. 3관왕을 차지했지만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어깨 통증이 심해졌다. 2003년 3월 2일, 대학 입학식 날. 수술대에 누웠다. 기분이 좀 묘했다.
‘난 꺾이지 않는다.’ 첫 번째 수술 때처럼 통증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역기를 들었다. 욕심이 화근이었다. 숟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망가졌다. 병원에서는 “이제 운동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 이제 뭘 하지? 잘하는 것은 역도뿐인데….’ 주변에서는 “사재혁은 끝났다”라는 말도 들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해 11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칼을 댔다.
수술실에 누워있는 동안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팔·다리가 부러져 온 몸을 붕대로 휘감고 있는 사람, 심지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석 달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한 줄기 희망을 얻었다. 예전에는 거들 떠 보지도 않던, 지루한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통증 부위의 잔 근육을 발달시키는 보강훈련이었다. 큰 근육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사재혁. 미세한 근육까지 더해지자 근력이 폭발적으로 향상됐다.
○수술 기계를 망가뜨릴 정도의 강골
2년만에 참가한 2004년 전국체전. 사재혁은 69kg급에서 이배영(29)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 해 겨울 난생 처음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어머니 김선이(45)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말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흘렀다. “그래, 장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이제 다치지만 말자.”
어머니의 바람에도 하늘은 무심했다. 2005세계주니어선수권 1위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중 역기에 팔을 찧었다. 오른 손목 주상골 골절이었다.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주사를 맞았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의료진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골밀도가 워낙 높아 고가의 수술기계가 망가졌다”고 수군거렸다. “죄송합니다. 다시 좀 재워주세요.” 다시 마취를 했고, 새 기계를 가져온 끝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기계를 망가뜨릴 정도의 강골. 하지만 이번에도 충실히 재활에 임했다. 결국 결과는 금메달이었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
금메달리스트의 가장 큰 적은 목표의식의 부재.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역도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전병관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전병관은 “내 체중의 3배를 들겠다”는 목표로 자신을 채찍질했다. 사재혁의 최종목표는 용상 215kg. 세계기록(210kg)을 5kg이나 넘어서는 대기록이다.
베이징올림픽 역도 77kg 결승전 직후 은메달을 차지한 리홍리(28·중국)는 “사재혁이 금메달을 딸 줄은 몰랐다”고 했다. 부상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사재혁은 국제무대에서 무명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타고난 몸을 가진 사재혁이 겸손을 배우지 못했다면 세계정상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혹시라도 또 한 번 크게 아프다면 그 때는 또 다른 교훈을 얻게 되겠지요.” 2007년 당한 팔꿈치 부상에서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한 사재혁. 하지만 그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 “이제는 통증도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가 올림픽에서 든 합계 366kg의 원천에는 무한한 긍정의 힘이 있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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