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 휴즈 특별기고]더비 카운티 니겔 감독의 꿈

  • 입력 2009년 1월 9일 02시 58분


“오래전 일인데도 팬들은 마치 어제 일인 듯 말한다. 나는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임무를 완성할 것이다.”

아버지는 더비의 전설이었다. 그러나 36년 전 팀을 떠났고 죽는 날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이제 아들이 이곳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고 있다.

니겔 클러프 감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2부 리그 챔피언십의 더비 카운티는 8일 칼링컵 준결승 1차전에서 프리미어리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를 1-0으로 꺾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날 맨유 박지성은 출전하지 않았다.

더비는 축구 도시다. 1888년 리그에 참여해 초창기 잉글랜드 축구를 이끈 클럽이다.

1967년 니겔의 아버지 브라이언 클러프가 더비에 왔을 때 팀은 2부 리그의 하위권이었다. 브라이언은 불과 몇 년 만에 팀을 1부 리그 우승(1972년)과 유러피안컵(현 유럽축구연맹·UEFA컵 챔피언스리그) 4강(1973년)에 올려놓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구단주와의 갈등 때문에 1973년 팀을 떠나게 된다. 그는 다시 더비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더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더비의 인접 지역에 살았고 부인 바버라는 아직 그곳에 살고 있다. 브라이언은 더비 카운티를 그만둔 뒤 라이벌 팀 노팅엄 포리스트를 맡아 UEFA컵을 두 번이나 차지했다.

니겔 역시 노팅엄에서 축구 선수가 됐다. 두 클럽은 15마일 거리에 위치해 있다. 니겔은 지능적이면서도 창조적인 공격수로 성장해 잉글랜드 대표팀에 14번이나 뽑혔다. 브라이언은 섬세하진 않지만 전형적인 골잡이였다. 26세 때 무릎인대 파열로 일찍 선수 생명이 끝났지만 대표팀에 두번 선발됐다.

브라이언은 과거의 영광에 집착해 선수들을 악마같이 집요하게 몰아쳤다. 결국 그 집착이 그를 망하게 했다. 브라이언은 술에 빠졌고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 2004년 세상을 떴다.

더비엔 브라이언의 동상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도 있다. 브라이언은 다소 건방지고 자랑하길 좋아하지만 진정한 축구인이었다. 반면에 아들 니겔은 사려 깊고 겸손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니겔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왔다.

니겔은 더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5부 리그 팀인 버턴 앨비언을 10년간 지도했다.

니겔은 최근 더비로 옮겼다. 더비는 브라이언이 처음 맡았을 때와 비슷하게 2부 리그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42세의 니겔은 팀을 부활시켜야 한다.

브라이언은 30년 전 이런 말을 했다.

“더비를 떠나는 날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노팅엄에서 이룬 게 더 많다. 하지만 더비에서 느낀 팀 정신과 팬들의 사랑, 축구 그 자체를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할 준비가 됐다.

랍 휴스 잉글랜드 칼럼니스트 ROBHU800@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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