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직장동료, 친구들에게 밤늦게까지 불려 다니며 술을 즐기는 ‘주당’들도 아내가 임신하면 귀가 시간이 점차 빨라진다. “벌써부터 그러면 평생 잡혀산다”는 선배들의 조언에도 퇴근 후 발걸음은 절로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임신 4개월의 사랑스런 아내를 지척에 두고도 집에 갈 수도 맘껏 만날 수도 없는 이가 있다. 프로배구 신협상무 돌풍을 주도하고 있는 컴퓨터 세터 김상기(29)가 바로 그렇다.
○아내가 있었기에
“아내요? 정말 보고 싶죠. 임신하고 딱 세 번 집에 갔어요.”
실력파 세터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키가 워낙 작은 탓(178cm)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김상기는 올 시즌 장대 숲의 상대 블로커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현란한 토스워크로 신협상무 반란을 이끌고 있다. 신협상무는 KEPCO45, 대한항공, 삼성화재를 격파하며 벌써 6승을 올렸다. 장광균, 주상용 등이 활약하던 2005-2006시즌 거둔 10승 이상의 성적을 기대해볼 만 하다.
“갑작스레 주목을 받으니 좀 얼떨떨해요. 지난 1년 동안 멤버들과 꾸준히 호흡을 맞춰왔고 실력있는 후배들이 가세한 덕이죠.”
연일 계속되는 선전에 팀 분위기는 달아올랐지만 집에 있는 아내 정해연(30)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배구선수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를 붙잡아준 게 바로 아내였다. 몸담고 있던 서울시청이 2003년 11월 해체돼 1주일 내내 술을 마시며 방황할 때도 아내는 말없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줬고 한국전력에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다소 늦은 나이에 주목을 받으면서도 그녀가 힘들 때 정작 곁에서 함께할 수 없는 게 더 미안하다.
○특별했던 만남
아내와의 만남도 특별했다. 한양대 재학 중이던 2001년, 신촌 거리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인사를 건네며 전화번호를 물어왔다. 이영택(대한항공), 이경수(LIG손보) 등 당대 최고 스타 사이에서 재기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였던 김상기를 눈여겨 본 팬이었던 그는 아내의 고모부였다. 고모부의 소개로 만나게 된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김상기는 배려심이 깊은 아내에게 한 눈에 반했고 정해연씨는 속정이 많은 김상기에게 끌려 2005년 5월 결혼에 골인했다. 배구에는 문외한이었던 아내지만 이제는 남편의 경기를 본 후 “아까는 뒤로 빼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조언할 정도로 전문가가 다 됐다.
6월이면 태어날 아기 예명은 ‘사랑이’다. 무슨 태몽을 꿨느냐는 질문에 김상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잖아도 태몽 때문에 아내에게 많이 혼났어요. 분명 좋은 꿈을 꿨는데 자고 일어나니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 아내가 임신을 했어요.”
“제가 원래 이렇게 무뚝뚝해요”라고 너털웃음을 짓던 그는 자신이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라도 잠깐 보기 위해 아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줄행랑을 쳤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