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세터 김상기, 장대 블로커 녹이는 ‘신의 손’

  • 입력 2009년 1월 30일 08시 45분


178cm 단신 불구 현란한 토스워크로 상대팀 농락

평소 직장동료, 친구들에게 밤늦게까지 불려 다니며 술을 즐기는 ‘주당’들도 아내가 임신하면 귀가 시간이 점차 빨라진다. “벌써부터 그러면 평생 잡혀산다”는 선배들의 조언에도 퇴근 후 발걸음은 절로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임신 4개월의 사랑스런 아내를 지척에 두고도 집에 갈 수도 맘껏 만날 수도 없는 이가 있다. 프로배구 신협상무 돌풍을 주도하고 있는 컴퓨터 세터 김상기(29)가 바로 그렇다.

○아내가 있었기에

“아내요? 정말 보고 싶죠. 임신하고 딱 세 번 집에 갔어요.”

실력파 세터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키가 워낙 작은 탓(178cm)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김상기는 올 시즌 장대 숲의 상대 블로커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현란한 토스워크로 신협상무 반란을 이끌고 있다. 신협상무는 KEPCO45, 대한항공, 삼성화재를 격파하며 벌써 6승을 올렸다. 장광균, 주상용 등이 활약하던 2005-2006시즌 거둔 10승 이상의 성적을 기대해볼 만 하다.

“갑작스레 주목을 받으니 좀 얼떨떨해요. 지난 1년 동안 멤버들과 꾸준히 호흡을 맞춰왔고 실력있는 후배들이 가세한 덕이죠.”

연일 계속되는 선전에 팀 분위기는 달아올랐지만 집에 있는 아내 정해연(30)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배구선수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를 붙잡아준 게 바로 아내였다. 몸담고 있던 서울시청이 2003년 11월 해체돼 1주일 내내 술을 마시며 방황할 때도 아내는 말없이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줬고 한국전력에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다소 늦은 나이에 주목을 받으면서도 그녀가 힘들 때 정작 곁에서 함께할 수 없는 게 더 미안하다.

○특별했던 만남

아내와의 만남도 특별했다. 한양대 재학 중이던 2001년, 신촌 거리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인사를 건네며 전화번호를 물어왔다. 이영택(대한항공), 이경수(LIG손보) 등 당대 최고 스타 사이에서 재기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였던 김상기를 눈여겨 본 팬이었던 그는 아내의 고모부였다. 고모부의 소개로 만나게 된 둘은 금방 가까워졌다.

김상기는 배려심이 깊은 아내에게 한 눈에 반했고 정해연씨는 속정이 많은 김상기에게 끌려 2005년 5월 결혼에 골인했다. 배구에는 문외한이었던 아내지만 이제는 남편의 경기를 본 후 “아까는 뒤로 빼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고 조언할 정도로 전문가가 다 됐다.

6월이면 태어날 아기 예명은 ‘사랑이’다. 무슨 태몽을 꿨느냐는 질문에 김상기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잖아도 태몽 때문에 아내에게 많이 혼났어요. 분명 좋은 꿈을 꿨는데 자고 일어나니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 아내가 임신을 했어요.”

“제가 원래 이렇게 무뚝뚝해요”라고 너털웃음을 짓던 그는 자신이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라도 잠깐 보기 위해 아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인터뷰가 끝나기 무섭게 줄행랑을 쳤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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