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51)과 선동열(46). 아직도 팬들은 술자리에서 끊임없이 ‘누가 진정한 최고투수인가’에 대한 논쟁을 안주로 삼는다.
다섯 살 터울의 불세출의 두 투수는 각각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혜성처럼 등장했고, 한국야구에 빛나는 별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한국야구사를 놓고 볼 때 이들에 앞서 강속구로 무장한 초특급투수 원류를 찾아 올라가면 남우식(57)을 빼놓을 수 없다.
야구인들은 그를 두고 하나 같이 “전설적인 투수”라고 입을 모은다. 고교야구의 황금기가 시작된 1970년대 초반의 뜨거웠던 고교야구 열기를 기억하는 올드팬들은 ‘불세출의 투수’, ‘오빠부대의 원조’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남우식을 잊을 수 없다.
그가 1월 초 롯데우유에서 사명을 바꾼 ‘푸르밀’의 대표이사 전무로 발탁됐다. 야구스타에서 말단 영업사원으로 인생의 나침반을 돌린 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위치까지 오른 그의 이력은 야구인들 사이에 ‘신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야구와 인생사를 들어보기 위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푸르밀 본사를 찾았다.
○고교야구 6관왕 신화의 주인공
“남우식이라고 합니다. 경제부 기자들은 종종 만나지만 야구 기자가 모처럼 찾아주시니 반갑네요.”
중년의 온화한 인상과 말투. 그러나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에서 뭔지 모를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철완’의 흔적기관처럼 어깨는 여전히 떡 벌어져있었다.
1971년, 경북고는 천하무적의 위용을 자랑했다. 마치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정벌하며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처럼 그들은 전국의 모든 대회를 휩쓸고 지나갔다.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기에 이어 황금사자기까지 집어삼켰다.
서울에서 열린 전국규모 4대 대회를 모조리 석권한 것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는 전설. 뿐만 아니라 대구에서 열린 문교부장관기, 부산에서 거행된 전국고교야구대회(쌍룡기) 등 지방대회마저 그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해에만 6관왕. 6개 대회에서 32전 29승3패로 0.906의 믿어지지 않는 승률을 올렸다. 그래서 야구인들은 역대 고교야구 최강팀으로 주저 없이 1971년의 경북고를 꼽는다.
서영무 감독(작고)이 이끈 경북고는 훗날 국가대표 주축선수로 성장한 화려한 멤버로 짜였다. 남우식의 1년 후배인 투수 황규봉 이선희에다, 동기생인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손상대….
그 중에서도 전력의 핵은 모든 대회, 모든 경기에 등판해 승리를 이끈 남우식이었다. 특히 고교야구 붐을 타고 그해 대회가 창설된 봉황기에서 예선부터 결승까지 7경기를 모두 완투해 당장 ‘철완투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교야구 전성기 연 오빠부대의 원조
한양대 천보성 감독은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 그와 소주잔을 기울인다. 경북중부터 실업팀 롯데까지 같이 야구를 했으니 그야말로 죽마고우. 천 감독의 말이다.
“우리 멤버도 좋았지만 사실 우리는 별로 할 게 없었어요. 상대타자들이 우식이를 상대로 안타 한두 개 칠까말까 했으니까. 1-0, 2-0 승리가 상당히 많았어요. 우리가 1점만 뽑으면 이겼던 거죠. 매일 남우식 기사가 신문 반면을 차지했으니까 요즘으로 치면 박찬호나 이승엽 정도의 인기스타로 보면 돼요. 우식이가 연속 볼넷을 내주면 대문짝만하게 기사제목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당시는 스피드건이 없던 시절. 그러나 야구인들은 그의 직구가 시속 150km는 나왔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고교시절만 놓고 보면 최동원과 선동열을 능가한 투수라는 평가다.
“경기가 끝나면 동대문구장 앞에 팬들이 진을 치고 있어 한 시간 넘게 야구장에 갇혀있기도 했어요. 그 중에서도 우식이 인기가 단연 최고였어요. 여학생들이 여관까지 찾아와 팬레터와 선물을 잔뜩 놓고 가기도 했으니까. ” 천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본 프로팀의 스카우트 제의
그해 11월 경북고 선수를 주축으로 일본원정을 떠나 6전전승으로 일본의 콧대를 완전히 꺾었다. 여기서도 6경기 모두 등판해 일본 타자들을 제압하는 남우식의 투구에 일본도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첫 게임, 두 번째 게임을 이기니 놀라더니 세 번째 게임까지 이기니까 일본이 발칵 뒤집혀졌어요. 일본 스포츠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자기들보다 적어도 30년은 뒤처진다고 생각한 한국에 연전연패를 하니 일본 사사키 회장이 직접 찾아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이 한국에 배울 점이 있다’면서 매년 교환경기를 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이를 계기로 이후 정기적으로 한일고교 교환경기가 열리게 됐어요.”
○박철순의 스승이 되다
혹사의 대가는 혹독했다. 한양대로 진학한 뒤 갑자기 팔꿈치가 아팠다. “요즘에야 한 게임 던지면 며칠씩 쉬잖아요. 당시엔 혹사라는 개념도 없었어요. 그게 정석인 줄 알았지.” 그는 자신의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왼팔에 비해 공을 던진 오른팔이 심하게 굽어 있었다.
한양대 졸업반 때인 74년 말 창단팀으로 특별우선지명권이 주어진 실업 롯데에 입단한 뒤 77년 공군팀인 성무에 들어갔다. 그 때 헌칠한 키에 시원한 얼굴의 한 상병이 이등병인 그에게 찾아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전 박철순이라고 합니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님을 이렇게 만나게 돼 영광입니다.”
“어디 다니다 왔습니까?”
“연세대 다니다 휴학계 내고 여기 왔습니다. 투구폼 좀 봐 주십시오.”
나이로는 남우식이 네 살 위였지만 계급은 거꾸로. 당시만 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미완의 대기’ 박철순은 남우식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박철순의 회상이다. “남 선배는 저에게 우상이었죠. 군대라는 특수상황이었지만 저는 깍듯하게 모셨어요. 제가 고참이니까 저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니어서 제가 요청을 하면 투구폼을 지도해 주시곤 했어요. 지금은 팬들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그 형은 한국 최고의 투수였어요. 최동원 선동열 못지 않았죠. 강속구에 투구폼도 교과서적이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된 투수가 된 것도 그 분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구선수로 전설, 제2인생에서 신화
성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남우식은 롯데로 복귀한 뒤 천보성과 함께 1년 만에 은퇴했다. 롯데햄·우유에서 말단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개척해 나갔다.
1년 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대구·경북을 연고로 하는 삼성쪽에서 영입제의를 했지만 그는 제2의 인생에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최고경영자로 올라섰다.
당시 프로행을 택한 천 감독은 그를 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대스타가 소시지를 팔기 위해 10몇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고생 무지 했어요. 저녁에 소주를 마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신세한탄을 할 때는 저도 마음이 아팠죠. 명문대 출신들과 경쟁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어요. 독학으로 일어 공부하고…. 한번 마음만 먹으면 집요하게 파고든 친구였죠. 집념이 대단했어요. 친구지만 정말 존경스럽죠.”
야구선수로 ‘전설’을 만든 그는 제2의 인생에서 ‘신화’를 썼다.
“야구를 떠나 다른 길에서 살았지만 제가 후배들에게 야구 이외의 길도 있다는 걸 제시했다는 점에서 만족해요. 내가 가는 길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험난하게 느껴지죠. 그러나 이왕 선택한 길, 열심히 살면 누구든 최고가 될 수 있어요. 야구할 때처럼, 희망과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