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완주 40번 국민 희망전도사 “20년 사랑 감사해유~”

  • 입력 2009년 3월 16일 10시 14분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아름다운 마지막 레이스’

포기하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 2그룹서 완주

“힘들지만 홀가분… 또다른 삶 위해 달려야죠”

“국민 여러분, 감사해유∼. 여러분의 성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거예유∼.”

15일 열린 2009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80회 동아마라톤대회. 결승선을 통과한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9·삼성전자)의 얼굴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기쁨과 절망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듯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웃기도 했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봉주는 어느새 원기를 회복해 ‘팬들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국민 여러분의 갈채 덕분에 오늘까지 달릴 수 있었다”며 20년간 달린 원동력을 팬들의 사랑으로 돌렸다.

이봉주는 국민에게 마라토너 이상이었다. 국민은 언제나 성실하고 묵묵하게 땀 흘리는 그에게서 힘을 얻었다. 쓰러질 듯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세계 정상을 노크하는 그는 ‘희망 전도사’였다. 이봉주가 2007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30여 m를 뒤지다 케냐의 건각들을 제치고 2시간8분04초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이뤄냈을 때 팬들은 “역시 봉달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며 환호했다.

이날도 팬들의 관심은 온통 이봉주에게 쏠렸다. 케냐의 모세스 아루세이가 멀찌감치 선두를 달렸지만 서울 시민들은 “이봉주 파이팅”을 연호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는 장사가 없듯 불혹을 눈앞에 둔 이봉주의 이날 레이스에선 힘을 느낄 수 없었다. 이봉주는 이성운(조폐공사)과 박주영(한국전력) 등 후배들과 후미 그룹에서 레이스를 펼쳤다. 이봉주는 2시간16분46초로 전체 14위이자 국내선수 8위에 머물렀다. 이날 기록은 40번의 완주 가운데 뒤에서 여섯 번째 기록이었다.

이봉주는 이날 레이스를 위해 여느 때와 똑같이 지난해 12월부터 제주도와 전남 장흥군에서 4개월여 동안 땀을 흘렸지만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았다. 이날 레이스에선 처음부터 아예 2진 그룹으로 빠져 완주에 주력했다.

“마지막인데 팬들에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는 싫었어요. 케냐 선수들과 경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처음부터 제 몸 컨디션에 맞춰 뛰었습니다. 그런데도 힘드네요. 하지만 마음이 후련하고 홀가분합니다. 이제 맘 편히 미래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이봉주는 은퇴 후의 삶을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목표를 잡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한국 마라톤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며 후배들을 양성할 뜻을 밝혔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이봉주의 정신력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는 차원에서 그를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트레이너로 기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과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제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이봉주는 “솔직히 후배들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지영준 같은 든든한 후배가 있으니 걱정 마세요. 물론 후배들이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 한국 마라톤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20년 동안 ‘아름다운 레이스’를 펼친 이봉주. 떠나는 순간까지 그는 온통 한국 마라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특별취재반>




▲동아닷컴 온라인취재팀


▲동아닷컴 온라인취재팀

김화성 전문기자의 “잘가라, 봉달아”

‘봉달이’ 이봉주의 발은 상처투성이다. 성할 날이 없다. 모과처럼 울퉁불퉁하다. 발톱도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새카맣다. 한번 대회에 나가 완주하고 나면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 잘 걸을 수도 없다.

마라톤은 ‘발-발목-정강이-무릎-허벅지-골반’에 끊임없이 충격을 주는 반복 운동이다. 지루하고 단조롭다. 양발에 26개씩 있는 뼈와 골반∼발목에 이르는 5개의 뼈가 체중의 두세 배나 되는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봉달이는 너무 많이 뛰었다. 20년 동안 40번 완주는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정도다. 마라토너가 한 번 출전하려면 적어도 매주 330km씩 12주 동안은 달려야 한다. 이봉주는 42번(2번은 기권) 출전했으니 훈련 거리만도 16만6320km에 이른다. 여기에 대회 때 달린 거리와 하프마라톤 및 역전대회 출전까지 더하면 지구(약 4만192km)를 4바퀴 이상 돈 셈이다.

봉달이의 출발은 보잘것없었다. 겨우 이름 석 자를 내민 것은 1989년 제70회 전국체육대회 육상 남고부 1만 m에서였다. 1위는 강릉 명륜고 황영조가 차지했다. 기록은 30분35초. 당시 천안 광천고 이봉주는 3위(30분52초)로 턱걸이했다. 황영조에게 92.64m(17초)나 뒤졌다.

봉달이는 갈 데가 없었다. 대학이나 실업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았다. 1990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시청에 입단한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

봉달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1996년 3월 애틀랜타 올림픽 티켓이 걸린 동아국제마라톤(경주)에서 2위에 오르면서였다. 당시 코오롱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갑내기 황영조는 29위(2시간29분45초)로 올림픽 티켓을 따는 데 실패한 뒤 은퇴해 버렸다. 풀코스 도전 4번째 만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썼던 마라톤 천재는 그렇게 무대를 떠났다.

봉달이는 풀코스 도전 15번 만에 애틀랜타 올림픽 2위에 올랐다. 그 뒤로도 3번(2000년 시드니 24위, 2004년 아테네 14위, 2008년 베이징 28위)이나 더 도전했지만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아시아경기 2회 연속 우승(1998년 방콕, 2002년 부산),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등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는 두루 올랐지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렇다. 봉달이는 한 땀 한 땀 달려서 꽃을 피웠다. 쪼글쪼글한 얼굴, 덥수룩한 턱수염,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마른 명태 같은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누가 뭐라 하든 달리고 또 달렸다.

고등학교 육상부 첫날, 테니스 바지를 입고 갔다가 모든 부원을 배꼽 빠지게 만들었던 봉달이, 전국체전 충남 대표로 뽑혀 합숙훈련을 할 때 장대비가 쏟아지는데도 묵묵히 혼자 트랙을 달리던 봉달이,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봉주 선수는 턱수염이 힘의 원천인 것 같은데 왜 깎고 청와대에 왔느냐”고 묻자 “어르신 앞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하고 가는 것이 결례가 될 것 같아서”라고 했던 봉달이….

이젠 봉달이가 선수로서 달리는 것을 볼 수 없다. 우리 나이 마흔. 그의 앞에는 또 다른 인생 마라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다를 게 있겠는가. 인생이라는 달리기 경주도 선수는 1명뿐이다. 그것은 늘 그렇듯이 바로 나 자신이다.

마라톤은 고행이다. 온몸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날숨과 들숨의 리듬이다. 언 가지를 뚫고 마침내 토해내는 봄꽃이다.

봉달이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 달렸다. 불의 전차처럼 쉼 없이 달렸다. 먹이를 찾아 하루 40km 이상 달렸던 네안데르탈인처럼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도끼날을 갈아 마침내 바늘을 만들었다.

“봉달아, 그동안 정말 욕봤다. 이젠 좀 쉬면서 편안하게 인생을 달리려무나.”

mars@donga.com


▲동아닷컴 온라인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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