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빛본 ‘추신수 카드’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3월 23일 02시 56분


1할 타율 허덕이다 3점 쐐기포 공헌

“끝까지 믿어준 감독님 - 동료 고마워”

○ 경기 시작 전 추신수

“선발 실바가 싱커 자주 던질거야

태균아, 몸쪽 떨어지는 공 대비해”

○ 2점 홈런 친 김태균

“신수 말대로 실바 구종 딱딱 맞아

기다리던 공 들어와 한방에 날려”

“팀이 이기는 데 보탬이 됐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승리의 주역이 됐지만 흥분한 기색은 없었다. 대표팀 선발 과정부터 험난했던 그였다. 힘들게 하와이 전지훈련에 합류했지만 부상을 걱정한 구단의 간섭으로 훈련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수비는 아예 나설 수 없는 ‘반쪽 선수’였다. 과묵한 성격 탓에 드러내놓고 하소연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힘들다”는 말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의 유일한 메이저리거 추신수(27·클리블랜드)가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마침내 화끈한 한 방을 터뜨렸다. 그동안 겪었던 마음고생도 함께 날려 보냈다.

추신수는 22일 베네수엘라와의 준결승에서 2-0으로 앞선 1회 베네수엘라 선발 카를로스 실바에게서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3점 홈런을 뽑아냈다. 상대의 추격 의지를 단박에 꺾어버린 쐐기포였다. 베네수엘라 루이스 소호 감독은 “1회 5점을 내주면서 게임은 끝났다”고 말했다.

전날까지 추신수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타율은 0.100(10타수 1안타)에 불과했고 타점은 1개도 없었다. 7일 일본에 2-14로 콜드게임 패를 당할 때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해 2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그가 9일 일본과의 아시아라운드 순위 결정전에서 빠지고 한국이 승리하자 “한국이 이기려면 추신수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비난 여론까지 나왔다.

준결승전을 앞두고 클리블랜드는 “추신수를 수비수로 기용해도 좋다”고 통보해 왔다. 김인식 대표팀 감독(한화)은 장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를 우익수 겸 6번 타자로 선발 출장시켰다.

김 감독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수비까지 해야 방망이도 잘 맞는 선수가 있다. 추신수가 그런 경우인 것 같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다. 베네수엘라 선발투수인 실바가 위에서 공을 내리꽂는 스타일에 낮은 공을 던지기 때문에 추신수의 스윙 궤도와 맞을 거라고 판단했다. (오늘 결과로) 본인도 부담을 덜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신수의 말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김 감독의 ‘믿음의 야구’가 다시 빛을 발한 것.

추신수는 이날 자신이 쐐기 홈런을 때리기도 했지만 동료 선수들에게 해준 조언으로도 승리에 기여했다. 김태균(한화) 이대호(롯데) 정근우(SK)는 2000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함께 우승을 이끌었던 ‘친구’들이다. 김태균은 “실바를 상대해 본 추신수가 나를 비롯한 동기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 줬다. 우리 실력이라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며 자신감도 불어넣어 줬다”고 말했다.

시애틀에서 활약 중인 실바는 추신수가 미국프로야구 아메리칸리그에서 많이 상대해 본 선수였다. 추신수는 김태균에게 “실바가 몸쪽에 떨어지는 싱커 같은 공을 잘 던지니 대비하라”고 조언했다. 김태균은 2회초 실바의 시속 141km짜리 밋밋한 변화구를 2점 홈런으로 연결시켰다. 김태균은 “추신수가 말해준 대로 실바의 볼 배합이 딱딱 맞아 들어갔다”며 알토란 같은 정보를 준 친구를 높이 평가했다.

추신수는 “끝까지 믿어준 김인식 감독님과 여러 코치님, 그리고 위로를 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추신수는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더 말을 이어가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팀 코리아’의 믿음과 격려가 추신수를 극적으로 부활시켰다.

로스앤젤레스=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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