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러던데요. ‘곧 죽어도 좋으니 저런 남편하고 하루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말이에요.” 한국축구를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 허정무 감독. 가장으로서 모습은 어떠냐는 물음에 부인 최미나(55) 씨는 주저 없이 말했다. 남편의 대답. “화초에 물을 주고, 빨래도 직접 개어놓고, 설거지부터 하는데 이 정도면 만점 아닌가요?”
19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가진 ‘소문난 잉꼬’ 허 감독 부부와의 인터뷰는 시종 유쾌했다. 남편은 목 디스크 수술을 받은 부인의 목에 두른 스카프를 고쳐 매주며 살짝 어깨를 감싸는 남다른 정을 과시했다.
○남편,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당당한 필드의 지휘관이지만 집에서는 자상하다. 허 감독이 “집안에 선인장을 기르면서 수 년 간 앓던 아내의 천식이 싹 가셨다”며 대뜸 ‘선인장 예찬론’을 늘어놓자 최 씨는 “남편은 최고였고, 최고이고, 영원히 최고”라고 미소를 짓는다.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축구 얘기하는 남자’라고 했던가. 허 감독은 최 씨에게 축구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최 씨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로 신문, 방송을 보고 알지만 오래 살다보니 대표팀 결과 정도는 구분되더라고요. 지거나 비기는 날에는 혼자 방에 들어가 바둑판을 펼친 답니다”라고 했다.
아빠로서의 모습? 역시 만점. 두 딸(허화란, 허은)은 엄마가 질투할 만큼 아빠를 따른다. 최 씨는 “이이(허정무)가 합숙이 없을 때는 딸들을 직장까지 차로 데려다줘야 직성이 풀려요. 시집가지 않은 막내는 심성이 너무 착해 결혼시키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라고 웃었다. 허 감독도 “품성과 됨됨이가 좋고, 겉보기만 화려한 실속 없는 사람은 딱 질색”이라며 사윗감 조건을 공개했다.
부부는 큰 딸 화란씨가 데려온 쌍둥이 손자(강하준, 예준)를 내내 자랑했다. 방긋방긋 웃는 손자들을 꼭 안은 채 “우리 손자들 너무 예쁘지 않느냐”고 쉼 없이 되물었다. “자식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면 지나친 표현인가요?”
○한국에서 감독을 한다는 것
2007년 12월. 허 감독의 대표팀 사령탑 복귀는 대단한 이슈였다. 히딩크부터 베어벡까지, 7년여 간의 외국인 감독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 1년 정도는 비난과 질타에 시달렸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경질설’이 돌았다. 물론 후임으론 외국인 사령탑이 거론됐다. 17일 이란전을 마친 뒤에는 “허 감독은 예선용이고, 외국인 감독이 월드컵에 가지 않겠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허 감독은 단호하다. 그는 “막연히 ‘외국인’을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대주의적 발상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평생축구로 먹고 살았습니다. 축구로 명예와 혜택을 입었고, 지금껏 사랑받는 까닭도 거기에 있지요. ‘마지막 도전’이란 생각이 부임 때 느낀 감정이었답니다. 지금도 초심은 변치 않았어요.”
가족들의 격려가 컸다. 2000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한 허 감독이 워낙 고생을 심하게 한 탓에 또 어려운 길을 택한 그를 최 씨와 두 딸은 뜯어말렸다고. 화란 씨는 “아빠에 대한 나쁜 기사가 나오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라고 했다. 허 감독은 “월드컵 본선이 끝난 뒤 판단해 줬으면 해요. 예선이 끝나 ‘후련 하겠다’는 지인들이 있지만 솔직히 아니죠. 오히려 답답해요. 의지에 비해 환경은 그렇지 못하니. 젊은 감독? 세대교체를 나이로 따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원로부터 젊은이까지 두루 배워야죠. 나이가 아닌 사고에 의한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해요. 늘 깨어있는 사고로 대표팀을 이끌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북한 축구…월드컵, 미쳐보고 싶다!
“(정)대세나 (안)영학이가 전화 한 통 해주면 얼마나 좋아?”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북한축구로 화제를 돌리자 허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농담을 던진다. 본선행을 조기에 확정한 한국이지만 남은 2경기 또한 부담이 컸다. ‘유종의 미’란 측면도 있었지만 한국이 졸전했다면 북한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한국 때문에 예선 탈락했다’고 생떼를 부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정대세의 배탈사건(?)을 떠올리며 “4월 북한과 홈경기 끝나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어느 시대인데, 음식물에 약을 타?”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허 감독은 1년여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내다본다. 체력, 정신력, 조직력이 일치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다. “일단 16강에 오르면 무서울 게 없고, 못할 게 없어요. 한민족 특유의 신바람은 누구도 말릴 수 없죠. 그 때는 또 다른 신화를 작성할 수도 있어요. 축구란 모르는 겁니다. 기죽지 않고 덤벼야죠. 한 번 제대로 ‘미쳐보고’ 싶어요.”
그러나 조기에 베스트 11을 정할 생각은 없다. 남아공행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혹독한 경쟁 체제이다. “미리 정하면 경쟁관계가 깨질 뿐이죠. 백업 요원들은 포기하고, 기존 멤버들은 나태해질 수밖에 없어요. 엎치락뒤치락해야 발전합니다.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지만 일부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