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2월 1일자 본보 사회면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한국 남자농구가 처음으로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소식이었다. 당시 한국은 방콕에서 필리핀을 95-86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승리의 주역은 혼자서 50점을 넣은 신동파 대한농구협회 부회장(65)이었다. 3점슛도 없던 시절에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며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떠올랐다. 이런 맹활약으로 그는 요즘도 필리핀에서 농구 영웅으로 불리며 국빈 대접을 받고 있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러 그는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됐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그는 1994년 이후 처음으로 남자 농구대표팀 단장을 맡아 지난주 일본에서 끝난 동아시아선수권에서 한국이 4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8월 중국 톈진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 출전권을 따는 데 큰 힘이 됐다. 신 단장은 4경기를 치르는 동안 늘 똑같은 검은색 티셔츠만 고집했다. 최대 고비였던 중국과의 첫 경기를 이길 때 입기 시작한 뒤 행여 바꾸면 부정이라도 탈까 땀 냄새를 참아가며 계속 입었다. 그만큼 승리를 향한 염원이 대단했다. 그는 허재 대표팀 감독과도 탄탄한 호흡을 맞췄다. 둘 다 한 시대를 풍미한 농구 스타 출신으로 지도자로도 성공시대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 단장은 1977년 여자 실업팀 태평양 감독으로 드래프트에서 박찬숙을 뽑아 35연승을 달렸다. 허 감독 역시 김주성, 하승진, 토니 애킨스를 1순위로 선발해 ‘신의 손’이란 부러움을 샀다.
신 단장은 후배들이 자신이 이뤘던 영광을 재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마침 한국은 아시아선수권 예선에서 필리핀과 같은 조가 됐기에 그의 역할은 더 커 보인다. “선수들이 가슴에 단 태극마크의 의미를 잘 새겼으면 합니다. 이번에 잘해서 농구 중흥기가 와야 할 텐데….”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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