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기의 미국에서 ‘씨비스킷(SEABISCUIT)’의 전설은 시작된다. 구부정한 앞다리의 3세마 ‘씨비스킷’은 데뷔 이후 졸전을 거듭한다. 불운한 과거를 가졌던 조교사 스미스와 기수 폴라드가 씨비스킷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씨비스킷 조교에 힘쓰고, 결국 씨비스킷은 5만마일이 넘는 철도여행을 다니며 미국 각지의 유명마들을 굴복시킨다. 하지만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은 심각한 부상을 딛고 일어나 재기에 성공했던 피날레였다.
여기 한편의 이야기가 더 있다. 주인공은 명마 ‘백광’(국1·6세·수·20조 배대선 조교사). 2008년 4월 13일 뚝섬배(GⅢ) 대상경주를 마치고 ‘좌중수부계인대염’으로 출주정지를 받았던 백광이 줄기세포 치료를 마치고 경주로로 돌아온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경주마로 줄기세포 치료를 받은 건 백광이 최초다. 현재 백광은 오는 19일(일) 서울경마공원 제9경주로 열리는 SBS배 대상경주에 출마등록을 마친 상태다.
명마 ‘백광’의 과거는 화려했다. 통산 17번의 경주에 나가 9승, 2착 5회, 3착 3회로 승률 52.9%, 복승률 82.4%, 연승률 100%를 기록했다.
3세마였던 2006년에는 ‘문화일보배 대상경주’를 시작으로 ‘동아일보배 대상경주’, ‘농림부장관배 대상경주’를 휩쓸며 대상경주 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레이스 내용도 화려해 마지막 직선주로에서 내닫는 추입력이 대단했다.
잘 나가던 명마의 발목을 잡은 건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2007년 가을 앞다리 질병이 악화되어 1차로 휴양에 들어갔다. 재기를 위해 2008년 4월 뚝섬배에 출전했지만 오히려 인대염이 악화되어 출주정지 판정을 받게 된다.
경주마로서 인대염은 완치가 어려운 난치병이다. 다른 경주마라면 경주마 은퇴라는 방법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이수홍 마주와 배대선 조교사에게 백광의 존재는 남달랐다.
“줄기세포 치료의 완치가능성이 1%만 되더라도 백광을 살리려 노력했을 것”이라고 배 조교사는 당시를 회상한다. 결국 한국에서는 연구실적도 전무하고 경주마 치료에 사용된 적이 없던 줄기세포 치료가 이루어졌다.
앞으로 백광의 부활과 화려했던 전성기를 다시 목격하게 될지는 확실치 않다. 줄기세포 치료의 성공여부와는 상관없이 백광은 어느덧 경주마로서는 중장년기에 속하는 6세마가 되었다.
게다가 1년이 넘는 휴양은 백광에게서 경주마의 본성을 앗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대선 조교사는 말한다. “명마 백광은 재기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끝을 모르는 집념의 경주마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전설의 씨비스킷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