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56·성균관대스포츠단 총감독) 성균관대 겸임교수는 故조오련 씨를 가장 잘 아는 수영인 중 한명이다. 선수시절 태릉생활을 함께 한 김 교수는 은퇴 뒤 후에도 도버해협 횡단 코치 등으로 조 씨와 호흡을 맞췄다. 김 교수와 대한수영연맹 정부광 부회장, 이동운 총무이사, 경영대표팀 노민상 감독 등 수영인들을 통해 조 씨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봤다.
○타고난 천재
조오련 씨는 전남 해남고등학교 1학년시절, 무작정 상경했다.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며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던 조 씨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YMCA 수영장에 등록했다. 이미 고향에서는 강물헤엄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다. ‘촌놈’이라는 질시를 받으며, 출전한 첫 대회. 등록선수보다 좋은 성적을 낸 그는 양정고등학교에 스카우트된다. 정규 수영수업을 받은 지 만 2년. 그는 1970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당시 일본수영의 영웅 후루하시(세계기록 33번 경신)는 “저렇게 물을 잘 타는 선수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지독한 독종
하지만, 타고난 재능도 노력이 없이는 꽃피우지 못하는 법. 조 씨는 상경 이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러닝을 했다. 운동생리학이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그런 독한 훈련방법은 그의 심폐지구력을 향상시켰다. 정부광 부회장은 “지도자가 ‘100m를 1분20초 사이클로 10번 왕복하라’고 하면, 조오련 씨는 1분5초 사이클로 십 수 차례 왕복했다”고 말했다. 지도자가 먼저 지칠 정도. 결국 그는 당시 선수 나이로는 환갑 줄인 서른 가까이 물살을 갈랐다.
○원조 수영스타
이동운 총무이사는 “(조)오련이 형이랑 밥을 먹으러 가서는 밥값을 내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조오련의 등장 이전만 해도 아시아수영은 일본의 독무대. 당시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지금의 올림픽 금메달과 버금가는 뉴스였다. 노민상 감독은 “조오련 씨는 수영선수를 넘어 당대 최고의 스포츠스타였다”면서 “어렵던 시절, 항상 좋은 수영복을 가지고 있어 후배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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