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을 할 기회가 와도 거부하겠다’는 어느 조연 전문 배우의 인터뷰를 얼마 전 인상 깊게 읽었다. 본인이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면 그 영화는 이미 실패라는 그의 설명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in place) 일은 사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자가 끊임없이 스스로와 싸워온 것도 이 같은 ‘제자리 찾기’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10여 년에 걸친 스포츠기자 생활, 또 10여 년째 스포츠 에이전트를 하면서 나를 괴롭힌 질문 중의 하나는 ‘왜 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다. 기자나 에이전트나 ‘남’을 주인공으로 해서 먹고 산다는 점에선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기자를 지칭하는 리포터(Reporter)는 짐꾼(Porter)이 물건을 실어 나르듯 남의 이야기를 옮겨 싣는(Report) 직업이고, 에이전트는 어떤 특정인을 대리(Represent)해서 일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둘 다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을 ‘빛나게’ 해야 인정을 받는 직업이다. 그게 싫어선지 기자를 할 때도 명함에 리포터라는 이름보다는 평론가의 의미를 담은 저널리스트(Journalist)라는 표현을 고집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라는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을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외쳐왔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대리인 아니 조연으로 살아가는 현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처럼 가당찮지만, 스스로에겐 심각했던 그런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 바로 ‘제자리 찾기’였다.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인가를 살아가면서 점점 실감한다.
만일 필자가 ‘조연’의 신분을 망각하고 ‘주연’이 되고자 했다면 이영표, 설기현 등 지금의 고객들은 이미 주위에서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 이후 카메라의 앵글에서 가능하면 멀어지려고 하고, 언론의 인터뷰도 줄곧 사양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했다. 고객이 빛나기 위해 스스로는 더욱 낮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주인공이 되려면 남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역사를 바꿔보겠다는 공명심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가 제격일 테고, 예능에 남다른 소질이 있다면 엔터테이너가, 신체적 능력이 출중하다면 스포츠스타로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조연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주연이 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주변 사람 고생시키고, 있는 것 조차 까먹기 일쑤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고,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 그건 중력이 작용하는 우주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이전트가 되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들을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관심의 초점이 되려는 순간 질서는 무너지고 남는 것은 폐허뿐이다. 화려함을 꿈꾸며 에이전트가 되려는 젊은이가 있다면 ‘아름다운 조연’으로 머물 자신이 있는지부터 돌아보라. 스스로 킹이 되기보다는 ‘킹 메이커’가 되는 일도 어쩌면 ‘역사적 사명’에 부합하는 일이 될 테니까.
지쎈 사장 스포츠전문지에서 10여 년간 축구기자와 축구팀장을 거쳤다. 현재 이영표 설기현 등 굵직한 선수들을 매니지먼트하는 중견 에이전트다.